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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96>5년 기다려 꽃피는 얼레지 나물로 먹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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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릉 숲에서 보내는 편지]<96>5년 기다려 꽃피는 얼레지 나물로 먹어서야…

입력
2004.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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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백양산 자락으로 산행을 다녀오신 분이 카메라에 봄소식을 담아 오셨더군요. 봄이 코앞에 왔음을 느끼긴 했지만 '벌써!'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지난 며칠 간 날씨가 포근했던 까닭에 이곳 저곳에서 움트고 있는 봄의 움직임이 더욱 확연히 감지됩니다. 반가움도 있지만 이러다가 조만간 불어 닥칠 꽃샘추위나 꽃을 찾는 인파에 식물이 훼손되지 않을까 걱정도 큽니다. 짚신장사와 우산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비오는 날과 갠 날 모두 걱정이듯 말입니다.

이런 봄이면 생각나는 꽃 가운데 얼레지가 있습니다. 식물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얼레지가 정말 곱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해 금산을 비롯해 점봉산, 설악산 같은 온갖 크고 높은 산을 돌아다닌 경험이 있습니다. 왜 얼레지가 좋았을까요? 아기 손바닥처럼 넙적하며 자색 얼룩이 진 녹색의 두터운 잎 사이로 꽃자루가 올라오면 고개 숙여 다소곳이 맺혀있던 꽃봉오리는 이내 여섯장의 꽃잎을 한껏 펼쳐내며 드러난 자신의 개성을 드러냅니다. 여느 꽃들처럼 그저 활짝 꽃잎을 벌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뒤로 젖혀 꽃잎의 뒷면들이 서로 잇닿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꽃잎 안으로 보랏빛 암술대며 이를 둘러싼 수술대가 고스란히 드러나지요. 산골의 수줍던 처녀치고는 파격적인 개방적입니다. 글쎄요, 그 자유로움이 좋았을까요? 그런데 이 얼레지는 숲에서 보아야지, 자신의 것으로 탐내서는 안 됩니다. 우선 씨앗을 뿌려, 싹이 트고 꽃이 피기까지 5년 정도는 족히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 어여쁜 모습은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지요. 이 식물이 탐이 난 나머지 욕심을 내 한 포기 캐어가려고 했던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그 일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땅 속에는 둥근 덩이줄기가 있고 그 덩이줄기엔 가늘고 긴 땅속줄기가 이어져 있는데 이 부분까지 무사히 옮겨와 살리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재미난 것은 땅속줄기의 길이로 이 얼레지의 나이를 대략 알 수 있는데, 매년 땅속 덩이줄기의 길이 만큼 땅속으로 깊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만일 땅속줄기가 땅속으로 60㎝ 정도 들어가 있는데 덩이줄기의 길이가 3㎝ 정도라면 20년쯤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 가녀린 풀이 말입니다.

대부분의 땅속줄기는 땅속에서 양분을 저장해 커나가지만 얼레지는 잎이 광합성을 해 만든 양분을 만들어 덩이줄기에 저장합니다. 이듬해 그 덩이줄기가 양분을 모태로 올려 보낸 뒤 죽고나면 그 밑에, 그러니까 올해의 덩이줄기 길이 만큼 땅 속으로 들어간 부분에 매년 새로운 덩이줄기가 생겨 다시 한 해의 양분을 비축하게 됩니다.

주의해야할 것은 얼레지가 매년 덩이줄기에 한해 살아갈 것만을 저장해 사용한 뒤 죽고, 다시 만들어지기를 거듭하므로 만일 우리가 얼레지 잎으로 만든 나물이 맛있다고 잎을 모두 따 버리면 내년에 꽃을 만들 양분을 비축할 방법이 없어져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워진다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산나물이 포기의 눈(芽)만 살려 놓고 잎만 따면 얼마든지 새로운 잎을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래서 저 같으면 아무리 부드러운 맛이 좋다해도 그냥 바라보기도 아까운 얼레지를 나물로 먹겠다고 잎을 따는 일일랑 하지 않겠습니다. 봄나물이 식물이 주는 향긋한 선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선물에 대한 고마움이 있다면 얼레지처럼 봄식물의 처한 어려움도 배려도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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