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임 일성으로 '분배보다는 성장이 우선'이라고 밝혔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정책이 재벌체제에 대한 재평가로 구체화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으로 경제위기를 불러왔다'는 부정적 평가에 기초한 재벌정책이 '고용과 투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재벌의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급선회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22일 강신호 전경련 회장과의 골프장 회동에서 이 부총리가 '창업형 기업가'의 중요성을 밝히고 나선 것은 재벌의 투명성 확보만으로는 투자활성화나 고용증대 등 당면한 경제현안을 풀 수 없다는 현실 인식 때문이다. 이날 회동에서 이 부총리는 이병철, 정주영 등 대표적인 재벌 창업가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1970∼1980년의 개발연대에 정부와 재벌의 협조적 관계에 바탕을 둔 해외시장 개척방안에도 긍정적 반응을 보여 수출과 내수 등 경제 전반에 걸쳐 성장을 매개로 한 정부와 재계의 밀월 관계가 본격화할 조짐이다.
이 부총리의 이날 발언 중 가장 주목할 부문은 "관리형 기업가의 득세로 성장 잠재력이 약화하고 있으며, 창업형 기업가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대목이다. 이 부총리의 발언은 외환위기 이후 미국식 경영이 보편화하면서 주주가치 극대화를 목표로 주가나 순이익 관리에 주력하며, 정부가 요구해온 투자확대에는 부정적 반응을 보여온 일부 기업의 경영행태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된다.
또 '창업형 기업'에는 기존 재벌의 과감한 투자도 포함된다고 밝힌 것은, 정부가 성장잠재력을 확충하기 위해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면 재벌이 불편해하는 규제를 대폭 완화해 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부총리는 대대적인 규제완화 방안을 내놓을 것임을 거듭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 18일 국회 답변에서 "우리나라 기업 환경은 여러 가지 규제가 많기 때문에 10점 만점에 잘 주면 7점 정도인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또 최근 정례 언론 브리핑에서는 "투자 활성화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는지 경제 단체들과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겠다. 한 달 정도 지나면 투명한 정책 방향이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 부총리와 전경련 회장의 전격 회동으로 긴장 관계였던 정부와 재계의 관계는 큰 변화가 예상된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부총리가 취임 후 첫 대화 파트너로 전경련 회장을 택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라며 "이 부총리는 기업과 시장을 아는 사람인 만큼 기업의 경영 여건 개선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정부의 정책기조 변화가 경제의 역동성보다는 경제력 집중과 제조업 공동화 현상을 심화하는 부작용만을 낳게 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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