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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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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

입력
2004.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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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 모리스 지음·박유안 옮김 바람구두 발행·1만9,800원

곳곳이 유구한 역사의 전시장이며 문화의 박물관이라고 할 만한 유럽을 여행해본 사람들은 대부분 아쉬움을 갖게 된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길을 사로잡는 유적과 절경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지만, 얽히고 설킨 민족과 영토 문제에 이르면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볼거리, 먹을거리를 일러주는 여행 안내서는 그것을 알아보기에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두꺼운 역사책이나 해설서를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뒤져볼 수도 없다.

'쟌 모리스의 50년간의 유럽여행'은 이런 고민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책이다. 종교, 정치, 민족, 교통, 역사 등 방대한 분야를 아우르며 독자를 유럽의 속살, 유럽인의 의식세계로 안내한다. 저자 쟌 모리스(78)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여행작가지만 그의 이력은 만만치 않은 내공을 말해준다. 영국 청년장교로 이탈리아 땅을 밟은 후 '더 타임스' 기자, 전문 여행작가로 반세기 넘게 북극에서 지중해까지, 아이슬란드에서 흑해까지를 수십차례 종횡으로 누볐다. 그가 각 지역과 도시를 소재로 쓴 글은 새로운 기행문학의 전형으로 평가됐다.

그는 1946년 2차대전 직후 점령군의 일원으로 머물렀던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여행을 시작한다. 아드리아해의 피요르드 해변을 따라 올라가면 이르는 작은 도시 트리에스테는 라틴계의 최일선이자, 게르만계의 최남단으로 각종 인종들이 모여 사는 집합소 같은 곳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유럽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찾아나간다.

그는 유럽에 일체감을 부여하는 건 종교가 아니라 바로 예술이라고 말한다. "유럽이란 예술, 법률, 풍속의 한 시스템"이라고 규정한 에드워드 기번의 말을 인용하면서 법률과 풍속은 기독교에 뿌리를 두지만, 유럽을 찬란하게 만든 힘은 문화예술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알프스 산맥을 넘던 콧대 높은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말을 인용한다. "(자연 풍광을) 볼 것도 없어요. 내가 다 작곡했거든요."

그의 기행은 나라와 이념과 민족의 장벽을 떠나 거침이 없다. 로마의 성베드로 광장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내리막길로 접어든 유럽 문명을 떠올리고,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과거 제국의 위엄을 그리워하면서도 노예처럼 미국의 꽁무니를 뒤쫓는다고 비꼰다. 고난과 좌절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향해, 건배!"를 외치는 불가리아인들, 스탈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신비의 나라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묘한 마법의 기운을 풍기는 핀란드 등에 대해서도 돋보기를 들이대며 민족과 종교, 역사의 현장을 살펴본다.

여행의 끝머리에 그는 다시 트리에스테의 아우다체 부두에 서서 유럽의 통합을 역설한다. "크고 작은 유럽의 나라들이 케사르의 것은 케사르에 돌려줘버리고, 믿음과 사랑이 고이 간직되는 박애의 땅을 만들어야 한다."

이 책은 유럽의 대학에서 문학은 물론 건축학 전공자들의 필독서가 될 만큼 성가가 높다. 책을 번역한 박영민(필명 박유안·37)씨도 런던대학에서 도시계획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이 책의 매력에 빠져 번역을 시작하고 출판사까지 차리게 됐다고 한다. 박씨는 "저자가 유럽의 문화와 도시에 대해 이처럼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기초자료 확보는 물론, 광범위한 연구가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작업"이라며 "유럽을 여행하기 전후에 꼭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말했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 저자 쟌 모리스는 누구

쟌 모리스(사진)는 20세기 여행문학의 새로운 글쓰기를 보여준 세계적 작가로 꼽힌다. 1960년대에 펴낸 '베네치아' '스페인' '옥스포드'와 함께 빅토시아 여왕 시대의 흥망을 다룬 '팍스 브리타니카' 3부작 등은 문학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잉글랜드 클리브톤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더 타임스'기자로 출발했다. 54년 영국 에베레스트 등반대를 취재했으며, 여행기 '베네치아'는 그를 일약 스타로 올려놓았다.

다섯 명의 자녀를 둔 가장에다 작가로서 성공을 거둘 즈음인 64년부터 그는 갑자기 성전환 수술을 위해 호르몬 투여를 시작하고 72년에 여자로 다시 태어났다. 당초 제임스 모리스라는 이름도 이때 쟌 모리스로 바꿨다. 그가 74년에 성전환 경험을 담아 발간한 자서전 '수수께끼'는 획기적인 문화 이벤트로 반향을 일으켰다.

성전환수술 후 30년간 귀가 따갑게 들어왔을 그 이유와 과정에 대한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대답한다.

"서너 살 무렵부터 내가 여자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호모 섹스를 꿈꾼 적은 없었다. 섹스보다는 포옹에 더 끌린 것 같다. 성전환 이후 감수성의 변화가 일어났고, 보다 부드러워진 문체의 글쓰기를 구사하게 됐다."

현재 그는 영국 웨일스 시골에서 다섯 아이를 낳은 아내(지금은 파트너라고 부른다)와 함께 자매처럼 살고 있으며 아이들은 그의 성전환에 대해 호의적이라고 한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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