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챙이처럼 뽈록 나온 배에 쫄쫄이 입는 게 곤욕이었죠."불혹의 나이에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트리코(스케이트 유니폼)를 입는 건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이다. 하얀 가운에 청진기를 귀에 꽂고 근엄하게 환자를 대하는 의사라면 더욱 그렇다. 본인도 "원수 같은 쫄쫄이 입을 때마다 창피해서 마음을 수도 없이 고쳐먹었다"고 했다.
김종구(40·전북일반·사진)씨는 현직 내과 의사다. 2남1녀 오붓한 가정의 가장이다. 해가 갈수록 산달(?)이 다가오는 배를 남들마냥 '인덕'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이다. 1998년 진료실에 틀어박힌 생활 탓에 몸무게가 80㎏을 넘자 그는 "하체운동엔 스케이트가 그만"이라며 스케이트 끈을 맸다.
시작은 자신의 비만 때문이지만 끝은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닿아있다. 그는 "운동만큼 건강에 좋은 게 없어요. 제 건강도 그렇지만 환자들에게 조언하려면 먼저 운동하는 모습으로 솔선수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취미생활로 시작한 운동 덕분에 몸무게를 10㎏ 이상 감량하자 욕심이 생겨 2001년 전국동계체전에 무턱대고 참가했다. 결과는 중·하위권. 밥 먹기 무섭게 스케이트만 타는 선수들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오기가 생긴 김씨는 "하루 2시간 하던 운동을 새벽에 1시간 더해 3시간으로 늘렸다"고 했다.
행운의 여신은 올해 그를 찾아왔다. 19일 제85회 전국동계체육대회 쇼트트랙 500m 결승전이 열린 전주화산실내빙상장. 모든 관심은 단연 돌아온 '비운의 스타' 김동성이었다. 김동성이 3명의 선수를 반 바퀴 이상 따돌릴 즈음 김씨는 안쪽으로 파고들다 다른 선수와 부딪쳐 빙판을 나뒹굴었다. 관중들은 "헉∼" 탄성을 질렀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아무도 나무라지 않을 상황, 그는 벌떡 일어나 트랙을 열심히 돌았다. 꼴찌(1분6초01)로 결승선을 넘었지만 다행히 한 선수가 실격 당해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1위 김동성은 말할 것도 없고 2위(54초25)와도 12초 이상 차이가 났지만 그는 "제 최고기록이 51초인데 긴장해서 그런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전날 실수를 만회라도 하듯 20일 열린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선 김동성(1분34초18)에 이어 2위(1분48초44)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20∼30대 팔팔한 젊음과 겨룬 의미 있는 '불혹의 승리'였다.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지난해 동계체육대회 준결승에서도 김동성과 맞붙었다. 그는 "두 차례나 세계적인 선수와 경기를 한 것도 기쁜데 좋은 결과까지 나와 너무 기쁘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스케이트 전도사답게 말했다. "스케이트는 박진감 넘치고 하체근력, 복부 근육 강화 및 요통까지 없애줘 중년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스케이트의 장점을 설명하는 그는 비로소 의사답다.
/전주=고찬유기자 jutdae@hk.co.kr
사진=박서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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