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영화감독과 평론가를 함께 무인도에 처박아놓고 ‘너희들끼리 봐라’라고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모양이다. 다르덴 형제의 ‘아들’의 일반 시사회장 분위기가 그랬다. 이 영화로 2002년 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받은 올리비에 구르메의 빛나는 연기도, 다큐멘터리로 잔뼈가 굵은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의 신중한 연출도 다 소용없었다.영화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관객들이 나가기 시작했고 남아 있는 관객도 도대체 어떻게 영화가 끝나는지 보자는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영화가 끝나자 객석에는 실소가 일었고 ‘평론가들이나 볼 영화구만’이라고 누군가가 쑥덕거렸다.
솔직히 ‘아들’은 신나고 재미 있고 극적인 영화는 아니다. (한 주의 피로가 몰려오는 금요일 저녁 이 영화를 본 필자도 중간 곳곳에서 졸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카메라는 주인공의 등 뒤에서 아무 것도 판단하지 않고 관찰하겠다는 듯이 붙어 다닌다. 소년원에서 출소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직업훈련원에서 목공 일을 지도하는 주인공 목수는 5년 전 자기 아들을 죽이고 감옥에 갔던 아이가 학생으로 와있던 것을 알고 흥분 상태에 빠진다.
그 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진 그 남자의 심리를 지켜보는 것이 이 영화의 전부다. 관객을 우롱한다는 섣부른 오해를 부를 만 하다. 얼마든지 극적으로 꾸밀 수 있는데 카메라는 오로지 주인공을 따라다니기만 하는 것이다.
오랜 다큐멘터리 경력을 갖고 있는 연출자들은 카메라의 시선의 윤리를 묻고 있다. 착하고 여린 주인공 남자는 아무 것도 판단하지 못하고 그저 혼란에 빠져 있지만 카메라는 텔레비전 드라마처럼 그가 보고 느끼는 것을 관객에게 정리해 보여주지 않는다. 엉망으로 찍은 듯한 이 영화가 고수의 영화로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도사들로 넘쳐 나는 이 감동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가 누군가의 삶을 지켜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다이제스트식 이해냐는 것이 ‘아들’의 연출자가 취하는 태도다. ‘아들’은 영화를 보고 느끼는 우리의 속 편한 감동의 본질을 질문하고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눈물 나는 일인지 경험하게 해준다.
1,000만 명의 관객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감동하는 거대한 집단주의의 나라에서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다. 대신, 말랑말랑한 감동과 웃음을 나열한 영화를 소개해드리겠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CF를 찍으러 도쿄에 왔다가 고독을 느낀 중년 미국 남자 배우와 출장 길의 남편을 따라온 젊은 주부가 짧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대부’의 프랜시스 코폴라 감독의 딸인 소피아 코폴라의 재능은 낯선 이국 땅에서 자기 존재와 주변 관계의 허무한 본질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어른들의 사랑에 대한 갈급증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목포는 항구다’는 서울 형사가 목포 깡패 조직에 위장 잠입해 벌이는 해프닝을 소재로 5분마다 한 번씩 관객을 웃겨야 한다는 조급증에 빠져 영화 전체의 꼴은 아랑곳 없이 각양각색의 웃음을 전시하고 있다. 등장인물 모두 한 두 번씩은 망가지는 가운데 확실하게 무너지며 팬 서비스하는 배우는 조재현과 차인표다.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믿기 힘든 상황을 소재로 꽤 요령 있게 웃기는 상황을 코미디로 펼친다. 이 영화의 불운은 완성도에 비해 주목을 덜 받고 있다는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태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돛단배가 한 척 뜬 상황과 같기 때문이다. 하긴, 그건 다른 영화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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