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징이 지배하는 정치는 자칫 공허하다. 그러나 때로 상징은 실질보다 훨씬 절실하다. 중견언론인 모임 관훈클럽이 17일 마련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 초청 토론회를 지켜보며 새삼 느낀 것도, 한나라당은 상징이 절실하다는 것이었다. 최 대표는 진지하고 성실했다. 별것 아닌 번지르르한 말과 조잡한 상징 조작으로 뜨기 일쑤인 세태에서 돋보이는 면모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애초에 상징이 아니고, 어떤 상징도 만들 처지가 못 된다. 어느 때보다 상징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는 설명에 열심인 모습이 보기 안쓰러웠다. 그의 잘잘못을 떠나 구차했다.■ 한나라당의 당면과제에 대한 최 대표의 소신에 언론은 그나마 관심 갖지만, 정작 국민이 얼마나 귀 기울이는지 의문이다. 대선자금 수사가 부추긴 한나라당의 위기를 보수계층은 안타깝게 여기고, 더러 권력의 장난이라고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지지층의 의욕마저 앗아간 위기의 원인과 책임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지금 무의미하다. 한나라당이 부패와 악덕의 구덩이로 전락한 마당에, 한 구덩이에 있던 이가 과거 청산을 외치는 것은 당초 쓸모없다. 이회창 전 총재나 서청원 전 대표를 탓하는 것도 흘러간 물에 침 뱉는 격이다. 지금 그런 사리를 따지는 것은 열렬한 지지계층도 별 관심 없을 것이다.
■ 최 대표 토론회에서 대선 전 이회창 후보초청 관훈토론회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때 이 후보는 정체를 헤아리기 힘든 위기를 직시하기보다, 막연히 이 사회의 보수적 전통과 의식에 의지한 모습이었다. 이를테면 거리에는 거친 진보와 개혁의 열기가 뜨거운 데도, 시원하게 냉방한 보수의 틀에 점잖게 자리잡는 것을 승리의 방책으로 여기는 듯했다. 지역과 이념과 계층을 경계로 갈가리 찢긴 나라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가, 오로지 보수의 극단을 지향하는 것은 실망스러웠다. 그의 협소한 안목과 주변의 안이하면서도 맹목적인 탐욕이 권력 장악에 이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시대라고 보았다.
■ 이회창씨의 불행은 대쪽의 상징성이 퇴색하고 이념과 계층 등이 상징 다툼의 주제가 된 상황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 지금 한나라당은 훨씬 절박한 위기에 처했다. 도덕성과 존재가치가 아예 부정되는 상황에서 어떤 언행을 하더라도 한층 수렁 깊이 빠져드는 형국이다. 여기서 헤어나는 길은 당을 해체하고 새로 만드는 따위가 아니다. 여권은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지만, 정치가 온통 매도되는 상황에서는 그 정치의 틀을 깨는 상징을 먼저 내세우는 쪽이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다. 최 대표에게 역할이 있다면, 정치 바깥에서 그 상징이 될 인물을 찾아내는 것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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