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에 얘기로 돌아가자. 나는 KBS 2TV '할아버지 할머니'에 다시 출연했다. 1985년 여름 때 일이다. 원래 84년 봄 10번 출연하고 끝을 맺었는데 노인네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못 이겨 4회 연속 출연했다. 이 무렵 CBS에서도 매주 목요일 나의 '알로에 건강법'을 내보냈다.나는 알로에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33년 동안 온갖 병마를 달고 살았던 나의 간증록을 나름대로 정리, 난치병 환자는 물론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
이 같은 바람은 어렵지 않게 뜻을 이뤘다. 85년 가을 '건강 다이제스트'란 월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건강 다이제스트는 14만부의 발행부수를 자랑했다. 건강잡지로는 이땅에서 독보적 존재였다.
중간에 다리를 놓아 이 잡지에 연재를 하기로 했다. 건강 다이제스트는 김형섭 사장이 발행인을 맡았다. 나는 김 사장 주위 사람을 살펴보았다. 그때 안현필 선생이 자연식에 관한 칼럼을 이 잡지에 연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 잡지 주필을 역임한 바 있다. 안 선생을 통하면 이 잡지에 글을 실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안 선생과 일면식도 없었다. 그와 친한 사람을 찾아야 했다.
때마침 나는 자연식주의자 친목단체인 '한마음회'의 회원이었고 이 모임의 실질적 리더인 이환종 선생이 그와 막역한 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를 통해 나는 안 선생과 만났다.
안 선생은 나와 알로에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오히려 나를 만나게 돼 기쁘다고 했다. 1913년 생으로 나보다 열 네 살 위인 안 선생은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정말 열정이 넘쳐 났다. 영어 참고서인 삼위일체를 쓴 그는 후에 삼위일체 건강법으로 명성을 날렸다. 안 선생은 대뜸 "육식은 사상과 지혜를 흐리게 한다"며 자연식에 관해 금세 나와 의기 투합했다.
안 선생의 인생역정도 나와 닮은 꼴이었다. 일제 때 두 형이 일본 유학 중 폐결핵에 걸려 당대 최고를 자랑한 도쿄대 병원에 입원, 좋다는 약은 다 써보았으나 끝내 20대 초반에 숨지고 말았다. 안 선생 본인도 심장병과 고혈압, 당뇨병 등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거의 탕진하다시피 했으나 병세는 악화할 뿐이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온갖 명약을 끊고 자연식을 통해 인생을 다시 살게 됐다고 했다. 안 선생은 "세상 사람들은 약을 먹어야 병을 고친다고 믿어 왔지만 약보다 좋은 게 자연식"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두 번의 자살을 결심할 만큼 병마에 시달리다 알로에를 만난 뒤 새로운 삶을 얻은 내 사연을 듣고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기독교 신자들이 왜 성경을 반복해서 읽는 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주춤하자 그는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며 "신앙은 건강을 지키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안 선생에게 알로에 제품을 선물했다. 그는 "알로에도 자연식의 한 부분"이라며 활짝 웃었다. 안 선생은 내게 현미와 콩 율무 등 자연식을 소개해 줬고 나는 지금도 이를 즐기고 있다. 안 선생은 94년 봄부터 한국일보에 '삼위일체 건강법'을 연재,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안 선생은 김형섭 사장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받자 내 손을 잡고 곧바로 잡지사로 달려갔다.
이렇게 해서 나는 건강 다이제스트에 5년 동안 '건강교실'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당시 아픈 사연도 있었다. 김 사장에게는 위암 말기인 형이 있었다. 그 형은 나의 권유에 따라 자연식을 한 결과 몇 달 지나지 않아 뚜렷한 회복세를 보였다. 체중도 상당히 늘어났다. 그런데 그만 생식에 맛을 들였다가 변을 당했다. 소량의 생식으로 버티면서 매일 새벽 등산을 강행한 게 화근이었다. 영양실조로 눈이 멀게 된 그는 이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생식이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영양실조가 되도록 칼로리 섭취를 줄이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일깨운 사건이었다. 뭐든지 지나치면 해로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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