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중반에서 마흔 중반, 여배우에게는 참 어정쩡한 나이다. 가슴 떨리는 사랑이야기는 젊은 후배들에게 내준지 오래, 그렇다고 그들의 엄마로 '밥상 신'만 차지하기에는 아직 이르고 또 억울하다. 여배우의 '단명'을 재촉하는 연예계 풍토에 당당히 도전장을 낸 '3545 여우들'의 존재는 그래서 더 반갑다. 나이의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지혜롭게 새 길을 열어가는, 아름다운 그녀.처자식 버리고 딴 살림 차린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 노릇 하느라 꽃다운 젊음을 날린 것도 모자라 바람 피고 손찌검까지 하는 남편과 미련 없이 갈라섰다. KBS2 수목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에서 배종옥(40)이 연기하는 큰딸 미옥은 지독하게 박복한 여자다.
그렇게 꿈도 사랑도 접고 생선 비린내에 절어 사는 그에게 새 사랑이 찾아오지만, 총각 교수님과 애 딸린 이혼녀의 만남이 순탄할 리 없다. 남자 집안의 노골적인 멸시에 절망한 그는 애꿎은 엄마에게 "왜 날 이렇게 밖에 못키웠냐"며 악을 쓴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사랑하고, 종국에는 단란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 배종옥이 아니었다면, 뻔한 결말에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는 이혼녀의 사랑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물이 났을까.
"야 김미옥, 너 참 독하다. 징그럽다, 징그러." 애처롭게 매달리는 영민(박상면)에게 갖은 악담 다 퍼붓고 돌아선 미옥의 허탈한 독백.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속에 꾹꾹 눌러둔 미옥의 슬픔을 절절히 풀어내 '꽃아름' 중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1985년 KBS 특채로 데뷔해 올해로 연기인생 20년째, 배종옥은 참 다양한 삶을 살아왔다. 세련되고 당찬 직업여성('도시인')에서 남의 남자를 빼앗지만 미워할 수 없는 여자('거짓말' '위기의 남자'), 남편에게 이혼 당하고 새 남자에게도 차인 미혼모('그대 아직도 꿈꾸는가'), 그리고 유부남과 연하남 사이를 오가는 보헤미안('질투는 나의 힘')까지. 하지만 그는 "새 작품을 할 때마다 '배종옥씨 실제로도 그런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어떤 역할을 맡든 그 인물과 온전히 한 몸이 되는 농익은 연기에 대한 격찬에 다름 아니다. 올해로 꼭 마흔, 아무리 탄탄한 이력을 가졌어도 여배우에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여전히 두려운 일이다. "그래요.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편해요. 늙는 거 걱정하느라 시간 뺏기는 건 싫어요. 늘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으로 살아요." 역시 여우다. 같은 연배의 여자 연기자들이 코믹 연기로 '망가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변신은 좋지만 수 십년 지켜온 이미지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모습은 안타까워요." 조심스럽게 운을 뗀 그는 "사실 미옥도 자칫하면 망가졌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배역"이라면서 "그런 얘기 듣는 건 맡은 인물을 제대로 이해하고 연기하는 게 아니라 이미지 바꾸려는 욕심만으로 역을 맡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위험을 잘 아는 그이기에 작품 고르는 눈이 여간 깐깐하지 않다. 담당 PD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고, 스스로 납득이 돼야 비로소 결심을 굳힌다. 힘들 게 고른 작품이니 만큼 일단 하겠다고 나서면 아무도 그를 말리지 못한다.
"'바보 같은 사랑' 할 때는 걸음걸이부터 말투까지 죄다 뜯어 고쳤어요. 커피숍에서 몇 시간이고 앉아 사람들을 관찰한 적이 있는데 스푼으로 커피를 떠먹지를 않나, 참 별난 사람이 많더라구요. 그래서 특이한 동작을 드라마에 고스란히 써먹었죠."
배종옥은 참 솔직하다. 남이 들으면 고까워 할 얘기도 거침없이 쏟아놓는다. "요즘 드라마는 거의 보지 않아요. 말 안 되는 얘기가 하도 많아서." 영화관에도 "같이 갈 친구가 없어서" 잘 가지 않는다는 그는 책을 읽는다고 했다. "사실, 책도 내 책장에 정말 꽂아두고 싶은 건 1년에 두, 세권도 안 되지만요." 자의식이 이처럼 강한 연기자가 또 있을까 싶다.
그런 그이지만, 최근 들어 굳어진 어두운 이미지를 벗고 싶다는 욕심도 은근히 내비쳤다. "'꽃보다 아름다워' 시작할 때 박상면씨가 내 이미지가 너무 무겁다며 자기로 인해서 다시 태어날 거라고 그러대요. 그래서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제 의미도 있으면서 대중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부쩍 들어요."
세월이 가고 젊음이 사그러들면 누구든 꽃처럼 지게 마련이다. 인기 배우도 예외일 수 없다. 하지만 그라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꽃보다 아름다워지는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을 수 있지 않을까.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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