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 하 친일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이 국회에서 중음신(中陰身·죽은 뒤 다음 삶을 받을 때까지 떠도는 영혼)으로 묶여 있는 동안 '친일인명사전' 편찬 모금 운동은 범국민적 지지를 얻고 있다. 민족반역자를 역사적으로 심판하려는 보통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여의도의 두꺼운 돌집을 뚫고 철심장을 가진 '선량'들을 감동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그들에게 급한 것은 17대 국회에 개선장군처럼 선량으로 복귀하려는 야망뿐인가.대체 누가 일제 잔재 청산을 반대하는가. 어떤 개혁이든 강력한 반대자는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세상의 기본 이치다. 이 쟁점도 예외는 아니다. 이해관계가 명백한 상대는 어떤 정당성이나 논리와 대의명분과 설득에도 꿈쩍 않는다. 국민 전체의 0.0001%쯤 될까말까 한 친일반민족 행위자가 이에 해당될까.
이 극소수 반민족 세력이 독립운동가, 강제 징용 및 입대, 정신대, 부역, 공출 등등 일제의 직간접적 희생자인 절대다수를 누르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도깨비 방망이는 외세 의존과 분단과 독재와 군부통치라는 강압체제였다.
이제 민주화 시대에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던 질서를 바꿔야 한다. 그러자니 얼마나 억지스러운 말들이 많겠는가.
그들은 떳떳하게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뒤에서 '친일파라는 명칭이 틀렸다, 이미 흘러간 역사다, 당시에는 전 국민이 다 친일했다, 선각자의 비극이다, 강제에 의해 할 수 없이 한 행위라 동정이 간다, 지금 와서 친일파를 단죄한다면 후손들을 연좌제로 묶는 인권 침해다, 친일행위자가 사망해 진실을 밝히기 어렵다, 친일 규명 자체가 정치적으로 이용되기 쉽다, 죄에 못지 않게 공로가 크기 때문에 상쇄시켜야 한다, 친일 논란은 국론 분열을 가져온다, 세계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다' 등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청산 작업에 시비를 건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법률안은 위에 든 온갖 방패막이 논리들 중 단 한 가지도 적용되지 않는다. 친일반민족 행위자란 '능동적으로 민족 다수에게 지대한 해악을 끼친 극소수 지도급 인사들'이다.
그들은 고립이 두려워 국민 모두가, 그때 살았던 우리 조상 누구나 다 친일행위를 했다고 물귀신 작전을 편다. 이어 낡은 이데올로기의 무딘 칼로, 친일 청산을 요구하는 이들을 빨갱이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한다. 일제 침략자들과 합세한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인)이라고 지목했던 수법 그대로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전혀 모르는 젊은 세대 일부가 무의식적으로 천진하게 친일파 옹호론의 논리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청산하는 건 좋지만 다만…'이라고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는 논리 뒤에는 어김없이 위에 거론한 논리를 들이대며 방해작전에 나서는 그림자가 있다.
일제 잔재 청산은 논쟁거리도, 다수결 사항도 아니다. 제대로 된 독립국가라면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하여 당장 실현했어야 할 절체절명의 과업이다. 어떤 이유나 명분, 변명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이제까지 못 한 것을 통회하는 게 순국선열에 대한 살아남은 국민의 도리다.
이 과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반드시 국가 차원의 법률적 대응과 민간 차원의 연구가 결합돼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회에 계류 중인 법률안이며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하고 있는 친일인명사전이다. 두 과제가 성공적으로 완수되도록 국민적 지지가 다져지기를 기대한다.
임 헌 영 민족문제 연구소장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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