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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백발 청춘 74세 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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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에세이/백발 청춘 74세 조카

입력
2004.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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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김포에서 종친회를 했다. 고향을 떠나 서울, 경기에 사는 종친들과 모임을 가진 지도 어언 10여년. 공식적인 회의를 마치고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원한 해물탕 국물에 소주를 시켰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고 보니 초창기에 열심히 참석했던 어른들은 이제 하나 둘씩 세상을 등지고 있다. 이것이 인생인가.이 때 나와 마주 앉은 참석자 한 분이 눈에 띄었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는 나의 조카뻘이지만 나이는 74세였다. 그 옆에는 채권장사들이나 들고 다녔을 법한 낡은 가죽가방이 놓여 있었다. 뭘까? 궁금하면 남의 속주머니까지 뒤져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도대체 가방에 무엇이 들었습니까?" 그는 멈칫거리더니 가방을 펼쳐 내용물을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영어 회화 입문서와 사전, 일본어 교재, 컴퓨터 디스켓…. 74세 노인 가방에 들어있으리라고 짐작하기 어려운 물건들이 쏟아졌다. 그는 구청에서 운영하는 영어 회화 강습반에 다니고 있고 일본어 공부도 하고 있다고 했다. 백발을 휘날리며 젊은이 못지 않은 도전정신으로 살고 있는 그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그는 군에서 전기기술병으로 복무했고 그 때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제대 후 전기 사업을 해서 돈도 모았노라고 했다. 지금은 사업을 그만두었지만 건설회사 이사로 등재돼 월급을 받는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또한 그는 컴퓨터 디스켓을 만지작거리며 수줍은 듯이 말했다. "얼마 전 자서전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요즘에는 자서전을 컴퓨터로 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친 김에 컴퓨터 사용법도 공부하게 됐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글을 제대로 쓸 줄 몰라요. 자서전을 써서 손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데…. 그래서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요."

멋진 자서전을 써서 손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의 꿈이라고 했다. "우리 할멈이 컴퓨터 타자를 나보다 훨씬 잘 한다"며 얼굴을 붉혀 가며 웃는 모습은 천진한 소년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의 가치는 소중해진다. 이 분이야말로 노년의 소중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아는 현자(賢者)가 아닐까. 나는 74세의 조카와 이메일 주소를 교환하고 친구가 되기로 했다.

/이대규·경기 수원시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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