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한국의 老鋪]<21> 천안명물 학화호도과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국의 老鋪]<21> 천안명물 학화호도과자

입력
2004.02.17 00:00
0 0

"맛 있는 호도과자만 팔아온 게 아닙니다. 영혼과 마음의 양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생명의 빵을 소개하려고 노력했습니다."천안호도과자를 처음으로 세상에 내놓은 심복순(沈福順·90)할머니에게 호도과자는 분신이나 다름없다. 삶과 신앙을 살찌우게 한 영생의 빵이다. 그러니 세월이 흐른다 해도 그 맛에 변함이 있을 까닭이 없다. 이제 호도과자는 천안의 얼굴이다. 천안의 상징 삼거리 능수버들은 사라졌어도 그 빈 자리를 호도과자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호도과자는 일제강점기인 34년 조귀금(趙貴金·작고)·심복순 부부에 의해 태어났다. 그 산실이 천안시 대흥동 '학화(鶴華)호도과자'다. 천안역에서 아산 방향으로 30, 4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당시 일본인들도 천안지방의 특산물 호도를 원료로 생과자를 만들어 팔았지만 호도과자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심 할머니는 아침 7시부터 저녁 9시까지 손님을 맞이한다. 아흔의 나이가 믿기 지 않을 정도로 자태가 곱다. 어떤 손님은 할머니부터 찾는다. 직접 싸줘야 맛이 더 있다면서. 한적한 산중에서 옛 과자를 먹는다는 의미의 별칭 고과산방(古菓山房)은 손님의 그런 마음을 담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루에 만들어내는 호도과자는 약 3만개인데 일찍 떨어져 발길을 돌리는 손님도 많다.

신혼 초 남편은 새로운 제과를 만들고 싶어했다. 요즘말로 말하면 차별화의 시도였다. 부인이 먼저 제안을 했다. "광덕에서 많이 나는 호도와 흰팥을 이용해 무언가 만들 수 없을까요." 남편은 무릎을 쳤다. 부인이 말을 이었다. "호도를 이용할 거라면 호도모양의 과자를 만들면 좋지 않겠느냐". 광덕산 호도는 껍질이 얇고 맛이 매우 고소하다. 흰팥 또한 그리 흔치 않은 곡물이지만 그 풍미가 아주 독특하다. 남편은 흙으로 수많은 형태를 만들며 제빵기계를 연구했다. 이윽고 서울 을지로의 철물공작소에서 호도모양의 틀을 제작했다. 그 공작소는 현재 유명한 제과제빵기계 제작업체로 성장한 서일기계공업사의 전신이었다.

상호를 학화호도과자로 지었다. 학처럼 오래도록 호도과자의 이름이 빛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았다. 당시 맛을 본 일본인들이 반세기가 지난 뒤에도 여행길에 우정 천안을 찾는다. 그리고 "그 때 그 맛"이라고 감탄한다.

광복 뒤 홍익회에 납품하면서 학화호도과자는 전국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유사한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버젓이 '원조'라는 두 글자를 내세우는 집도 있었다. 심할머니는 속이 상했지만 제조법을 물으면 누구에게도 친절하게 일러준다. 대신 "맛 있게만 만들라"고 격려한다.

측량기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넉넉한 가정에서 자란 심할머니는 대전 정명여학교를 졸업하고 열 아홉살에 결혼했다. 천안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남편은 부인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반대해 성경책을 세 번이나 찢었다. 그런 남편도 부인의 정성에 감복해 만년에 기독교에 귀의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남편은 아홉살 때 고향 금산을 떠났다. 대전의 한 제과점에 취직했다. 그의 재주와 성실성을 눈 여겨 본 주인은 일본으로 귀국할 때 열 세살의 그를 데리고 갔다. 빵 만드는 기술을 4년간 배웠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그가 제과점에 취직해 받은 월급은 당시 일본인 도지사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87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심 할머니는 가업계승 문제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큰 아들은 주유소를 운영했고 막내아들은 대학교수로 있었지만 내심 자식들이 대물림 해주기를 바랐다. 마침 일본 여행 기회가 생겼다. 오사카에서 한국의 실내포장마차 비슷한 우동가게에 들렀다. 이 것 저 것 묻는 할머니에게 대학원까지 나온 젊은 주인은 3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90년 큰 아들에게 고속버스터미널 부근에 첫 분점을 내주었다. 사실 아들들은 일찍이 선친에게 제조법, 특히 흰팥 앙금을 내는 비법을 배웠다. 막내도 언제든 대를 이을 생각을 밝혔다. 이어 두 번째 분점을 열었다. 분점은 이제 손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선선자 후득복(先善者 後得福).' 심할머니의 가훈이다. 가훈은 곧 가업과 신앙생활의 방향이기도 하다. 80년대만 해도 심할머니는 천안에서 10번째 안에 들 정도로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그 재산을 가족만을 위해 움켜쥐지는 않았다. "돈이란 돌고 돌다가 잠시 내 손에 머무를 뿐입니다. 영원히 내 것이 아니죠. 돈이 한곳에 머무르면 곧 썩는 냄새가 나는 법입니다."

권사로 불리기를 더 좋아하는 심할머니는 호도과자를 팔아 번 돈을 선교사업에 아낌없이 희사했다. 그동안 지은 교회만 10개가 넘고 수많은 교회와 신학생, 장애인에 도움을 주고 있다.

70년대 한 청년이 불쑥 찾아왔다. 결혼상대와 함께. "할머니가 예전부터 여기서 장사하시던 분이 맞죠. 제가 할머니가 주신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자랐다는 말을 어머니에게 들었거든요." 청년은 고마운 마음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 초심(初心)을 잃는 경우가 흔하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초심은 근본을 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심할머니의 그런 자세가 학화호도과자를 영생의 길로 이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호도과자의 원조 학화호도과자는 만드는 과정부터 남 다르다. 밀가루 반죽을 물로 하지 않는다. 밀가루 한 포대를 반죽한다면 물은 겨우 한 바가지만 넣는다. 대신 계란과 우유를 주재료로 활용한다. 호도과자의 속을 채우는 앙금도 흰팥으로 만든다. 팥을 삶아 껍질을 벗기고 물을 세번쯤 갈아가며 씻어낸다. 앙금을 물엿처럼 녹인 설탕에 버무려 한번 더 열을 가해 물기를 알맞게 조절한다.

구울 때 호도 한 알을 여덟 쪽으로 나눠 한 조각씩 넣는데 호도조각이 살짝 내비치도록 구워낸다. 순도가 높아 2주일이 지나도 굳어지긴 하지만 쉬거나 상하는 법은 거의 없다. 오히려 갓 구어낸 것보다 진짜 호도알처럼 굳어진 과자가 더 맛이 좋다는 사람도 많다.

호도(또는 호두)는 다량의 지방질과 단백질을 함유하고 있다. '산림경제'에는 "독이 없고 먹으면 머리털이 검어지며 강장과 강정의 효과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란이 원산지로 추정되는 호도는 고려말 충렬왕 때 역관이었던 류청신(柳淸臣)이 사신들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하면서 묘목 3그루와 종자 5개를 얻어와 고향인 천안시 광덕면 광덕사 부근에 파종한 것이 시초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도 광덕사 입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400∼500년의 호도나무 몇 그루가 서 있는데 류청신이 파종한 나무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이 과실의 이름을 알지 못해 호국(胡國·원나라)에서 가져왔고 모양이 복숭아와 비슷하다 하여 호도(胡桃)라고 불리게 됐다.

광덕면 일대는 호도나무 생육에 적합한 기후와 토질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 광덕산 호도는 속껍질이 얇아 손질이 쉬운데다 맛도 참기름처럼 고소해 최상품으로 꼽힌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