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든가 금욕주의자라는 풍문이 있었다. 돈에는 관심 없는 깨끗한 정치가라는 거짓 신화가 오래 지속되었다. 주변 정상배가 조작한 이미지다. 불프 슈바르츠벨러의 저서 '히틀러와 돈'은 이 허구를 송두리째 뒤엎는다. 그가 권력을 잡고 권력이 강대해지자, 수많은 정상배가 몰려들어 이권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측근들이 백만을 모았다면, 히틀러 총통은 1939년 제국은행 지휘권 강탈 등을 통해 억만을 모았다.김영삼 전 대통령의 소박한 '칼국수 이미지'가 허물어지는 것을 보면 허탈하다. 대통령직에 오르며 "불법 정치자금은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청렴을 공언했고, 칼국수를 즐기던 그의 정직한 이미지가 진흙탕에 떨어지고 있다. 그로부터 94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직접 받았다는 측근 강삼재씨의 법정 진술이 국민을 아연케 하고 있다. 김영삼씨는 다음 달 12일 공판 증인으로 소환된다.
전두환씨에게는 아예 처음부터 그럴 듯한 이미지라는 게 없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유린하고 집권한 그는 가당치도 않게 '민주정의당'을 내세우면서 7년 동안 권력을 누렸다. 97년 2,205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314억원만 낸 그는 얼마 전에도 '가진 돈이 29만원뿐'이라고 국민을 조롱했다. 검찰이 최근 73억원의 전씨 비자금을 밝혀냄으로써 다시 형사처벌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프랑스 인류학자 무스에 따르면, 뭔가를 주고 받는 행위는 인류사회를 지탱시켜온 대원칙이다. 그는 선물 주고 받기에는 세 가지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선물을 주어야 하는 의무, 받아야 하는 의무, 언젠가는 보답해야 하는 상호성의 의무다. 정당한 이유 없이 타인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기초질서를 위협하는 행위가 된다. 그러나 '받아야 하는 의무'만큼 즐거우면서도 악용되는 것도 없다. 그 의무에는 선물과 관련된 상호성의 원칙을 상대가 조절하게 하는 낚시바늘이 들어 있다.
특히 정치인, 권력자가 받는 선물이 그러하다. 그들은 원래 구휼과 나눔의 대상이 아니다. '언젠가는 보답해야 하는 상호성 의무'에 대한 기대와 부담이 길항으로 작용하는 것이 정경유착의 고리다. 정치적 비리의 판단기준이 되는 '대가성 여부'는 한낱 말장난인 셈이다. 강삼재씨는 "무덤까지 안고 가려 했지만, 역사 앞에 죄를 짓고 배신할 수 없다는 결단에 따라 밝힌다"고 말했다.
'역사'가 운위되는 것은 아이러니다. 과거 그가 옆에서 돕던 김영삼씨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주도하며 전두환 노태우씨를 모두 감옥에 보낸 바 있다. 이들이 함구하는 한, 투명하고 민주적인 사회는 멀었고 역사도 바로 서지 않는다. 김영삼씨는 성실 증언을 해야 하고, 전씨는 다시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받아야 한다. 대통령 취임식이나 전직 대통령 청와대 모임 등에서 느물대며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는 사람의 얼굴을 보아야 하는 것은 국민의 고역이며 수모다.
전직 대통령의 비리 혐의, 현직 대통령과 관련된 대선 과정의 불법 자금 수수 등 보도되는 사건들이 굵직굵직하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그만큼 커진 것이다. 위험사회로 가는 속도가 빨라지고 깊은 비극을 남기고 있다. 지난해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자살했고, 최근 안상영 부산시장이 뒤를 이었다. 정경유착과 관련된 대표적 희생자들이었다.
얼마나 많은 정치인이 오도된 선물(뇌물) 의무로 인해 희생될 것이기에, 총선 열기가 이리 뜨거운가. 정치부패는 사회의 도덕적 불감증과 쌍생아다. 참신하던 정치인이 어느날 나락으로 추락하는 구조를 막아야 한다. '청백리는 없는가'라는 탄식만으로는 부족하다. 부패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살아 있게 하고, 정치인 감시를 좀더 체계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출마자들이 안 시장의 '아들아, 당당하게 살아라'라는 안쓰러운 유언을 잊지 말기 바란다.
박 래 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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