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대 문화의 형성이나 개인의 성장과정에서 외국문학이 차지하는 역할은 무척 크다. 그 가운데 영미문학의 비중은 특히 높은 편이다. 해방 이후 영미문학 중요 작품의 경우 작품마다 대개 수십 종에 이르는 번역서가 있었고, 지금도 새 번역이 이루어지고 있다.이런 양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 번역 풍토를 우려하는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할 뿐, 정작 안심하고 읽을 좋은 번역본이 얼마나 되며, 있다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제껏 제대로 된 자료가 나온 적이 없다. 일반 독자는 말할 것 없고 교육 현장의 교사나 교수조차 어떤 번역본을 고를지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의 연구(한국일보 14일자 보도)는 영미문학 중요 작품의 번역서를 총체적으로 검토·평가함으로써 독자와 학계에 좋은 번역본을 선별할 하나의 길잡이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진행됐다. 나아가 번역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출판 풍토를 개선하는데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취지도 있다. 대상은 영미 문학 대표작 가운데 친숙하게 읽혀온 작품을 우선으로 했다. 그러다 보니 장편소설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밀턴의 '실락원' 등 비소설도 포함됐다.
작업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여러 차례 협의를 통해 통일된 기준을 만들었고, 평가의 전 과정을 공동작업으로 했다. 결과에 대해 향후 토론과 비판을 열어 둔다. 덧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의 검토 대상이 개별 역자가 아니라, 최종 번역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역자 이름이 도용된 것으로 확인된 경우도 있었거니와 개별 번역자가 최선의 노력을 기할 번역 환경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번역의 문제를 역자의 문제로만 환원할 수는 없는 일이다.
평가 결과 영미문학의 번역은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빈곤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상 작품들의 번역서로 최종 검토 대상이 된 완역본은 총 573종인데 이중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모두 61종(11%)에 불과하다. 추천본이 없는 작품도 전체 작품의 3분의 1이 넘는다. 소설의 경우에는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에 불과하다. 그러나 비소설의 경우는 추천본 비율이 높으며(29%), 추천본의 종수가 가장 많은 것도 '햄릿'(10종)이었다.
또 검토본 가운데 반수 이상(54%·310종)이 표절본으로 그대로 베낀 것부터 짜집기, 윤문(潤文)까지 다양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표절본의 성행은 오랜 폐습이지만 1990년대 이후에도 줄지 않았으며, 오히려 소설의 경우 다수의 표절본이 이 시기에 출간됐다.
그럼에도 같은 시기 고전 번역에 가담한 새로운 세대 전문연구자들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초기에 나온 번역본이 이후 어떤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아 우수한 번역진의 층이 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더 좋은 번역환경이 마련되고, 다수의 독자들이 좋은 번역을 선별해 읽을 수 있다면 번역 풍토의 획기적인 개선도 기대할 수 있겠다.
/김영희 한국과학기술원 교수·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 연구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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