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에 열기는 다시 화끈하게 불붙었다. 1984년 말에는 KBS 2TV의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에 출연했다. 요즘은 자연건강식이니 자연의학이니 하는 말이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건강식품의 개념조차 애매했다. 알로에나 건강식을 자랑하면 우스개 소리로 흘려 듣는 이들이 여전히 많았다. '어디가 약간 잘 못된 게 아니냐'며 쑤군대기도 했다.알로에가 만병통치약이 아닌 건 분명하다. 하지만 특성에 맞춰 제대로 복용하면 얼마든지 많은 병을 고칠 수 있다. 나는 약초와 자연식을 통해 인체의 혈액이나 체액의 대사 기능을 바꾸면 병이 낫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방송에서도 이를 열심히 설명했다. 세균과 암세포를 죽이는 현대 의학만이 전부가 아니다. 식이·정신 요법으로 체액을 바꿈으로써 암세포가 존재할 수 없도록 해 병을 이긴다는 게 자연식의 논리라는 점을 거듭 설명했다.
그 해 9월 미국의 뉴스위크지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22세 영국 청년이 뇌암에 걸렸다. 병원에선 1년 이상 살 수 없다고 진단했다. 영국에는 일류 의학자들이 운영하는 암구조센터라는 게 많다고 했다. 그 청년은 그곳에 들어가 1년 동안 야채즙과 과실 현미를 먹었다. 식이·정신 요법도 곁들였다. 그 결과 뇌암이 완치됐고 6개월 뒤엔 마라톤을 하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소개하며 알로에와 함께 식이 요법을 병행하면 난치병을 고칠 수 있다고 역설했다.
83년 10월 다시 알로에 사업에 나섰을 때 한달 매출은 150만원도 안됐다. 1년 남짓 지나자 매출이 100배는 늘었다. 직원도 2명에서 30명이 됐다.
나는 기업은 인류를 위해 존재한다는 신념에 따라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분야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절인 당시엔 민주화와 인권 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하고 감옥살이를 한 사람이 참 많았다. 나는 겉 보기엔 알로에 사업자에 불과했다. 허나 사회개혁과 변혁을 꿈꾸던 청년시절의 기백은 살아 있었다. 나는 옥고를 치르는 양심수 가족 돕기에 힘썼다. 인권 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한 극비 작전이었다. 친구에게 돈을 건넸을 뿐 누가 얼마나 혜택을 입었는지는 지금도 알 지 못한다.
몇몇 노조도 지원했다.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인지라 노조를 돕는다는 것 자체가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사찰 당국에 들켰다면 내 사업은 물론 개인적으로 어떤 가혹행위를 당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방송국 주변에는 사찰 요원이 득실댔고 나는 TV에 수시로 나오는 명사가 됐지만 등잔 밑은 어두웠다. 기밀이 유지된 덕도 있지만 경찰과 정보 기관에서는 나를 흔한 '장사치'로 여겼을 법 하다.
크리스천아카데미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 고아원, 선천성 정신장애인 보호시설, 노동자 교회 등 수십 군데를 말없이 도왔다. 정확한 계산을 해 본적은 없지만 그 이후의 환경연합,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을 합치면 지금까지 100억원은 족히 되는 것 같다. 내게는 큰 돈이다.
보다 못한 강원룡 목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6.25 동란 때 부산에서 자네를 만난 후 30년이 지났네. 자네를 지켜보면 이리들 속에 양 한 마리를 풀어 놓아둔 것 같아 항상 조마조마 하다네"라며 불안해 했다. 이유를 묻자 설명이 이어졌다. "나는 목사가 아닌가. 교회에서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외치지만 주일 예배에 때 맞춰 찾아오는 모든 걸인들에게 돈을 준다면 생활비도 없어지지 않겠나. 그런데 자네는 어렵다는 단체나 사람을 보면 모두 도와주려고 하니, 어찌 되겠는가. 예수님도 '순하기는 비둘기같이, 지혜는 뱀같이 하라'고 설교하지 않았나." 조금 지혜롭게 살라는 충고였다. 나는 그러나 강 목사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다.
강 목사는 또 "자네가 일궈낸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된다 해도 알로에 황무지인 이 땅에서 붐을 일으킨 것만으로도 역사에 남을 만하다"는 격려도 잊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고난 속의 기쁨이 더 크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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