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볼 때 이를 악물고 감동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이 연극 '19 그리고 80'(연출 한태숙)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극장에 떠밀려 들어갔다. 이 연극은 서울 동숭동 대학로 정미소 극장(1월9일∼2월29일)에서 공연되고 내 그림은 그 극장 2층에 있는 정미소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극장으로 들어가는 친구들에게 등 떠밀려서 보게 되었다. 그러니 억지로 먹는 밥처럼 볼 메인 표정으로 퉁퉁 부어서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이번 전시도 친구들에게 떠밀려서 연극을 보러 갔다가 30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태숙과 연극인 윤석화를 거기서 만나고 자선전까지 갖게 되었다.왜 이렇게 떠밀려서 연극을 보는가, 나는? 나는 그림과 글과 영화보기를 즐긴다. 그것들은 다 집에서 이루어진다. 영화도 집에서 컴퓨터로 보고 글도 그림도 다 집에서 읽고 그린다. 그런데 연극은 극장으로 가야 한다. 사람들이 어둠 속에 옹기종기 붙어 앉아서 살아있는 배우들을 봐야 한다. 나는 극장으로 가는 일도 싫고, 어둠 속에 모르는 사람들과 붙어 앉아있는 일도 싫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도 민망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연극이라는 매체를 늘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내 친구 김방옥은 연극평론가다. 함께 회화를 전공하다가 연극으로 옮겨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이 토론했다. 온갖 매력을 지적하면서 연극이라는 매체를 설명해도 나는 끝내 공감하지 못했다. 연극은 늘 내 인생에서 숙제처럼 남아 있었다. 이 연극을 처음 보는 날도 나는 저항하고 있었다.
두 번 째 본 날 눈물이 났다. 눈물이 흐르는데 그냥 흐르도록 놔뒀다. 그 감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죽은 듯이 앉아있었다. 이런 것이 연극이구나 하면서…. 감동이 아주 복합적으로 밀려와서 어떻게 분해해서 나열할 수가 없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죽기로 작정한 사람이, 말 할 수 없이 순수한 사랑을 하면서, 그 덧없음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 절정에서, 스스로, 절정을 싹둑 잘라버리는 절제!
새털처럼 가볍게도 자신을 연출할 줄 아는 대 배우 박정자. 바로 곁에서, 나에게 말하는 듯이 착각하게 만드는, 그의 섬세한 연기. 선샤인 역을 맡은 송희정의 치기 어린 매력. 일인 삼역을 뚜렷이 구별해서 연기하는 최홍일, 중후한 박웅, 기품 있는 손봉숙 박완서 선생님조차 찬탄하게 만든 맑은 얼굴의 김영민. 그들은 무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내 방에도 천장에서 쇠줄을 늘어뜨리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롤드처럼 매달려 있고 싶다. 또 큰 나무도 설치하고 싶다. 그 가지에 걸터앉아서 점심을 먹고 싶다. 두 번째 보면서 울었다. 큰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는 해를 보고 있었다. 더 높이 떠올라서 스러져 가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있었다. 연극 속으로 잠겨 들고 있는, 눈물 젖은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김점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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