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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11> 김만중 vs 조성기/가문소설 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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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전문학사 라이벌]<11> 김만중 vs 조성기/가문소설 시대를 연 선의의 경쟁자

입력
2004.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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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중(金萬重)은 '구운몽(九雲夢)'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성기(趙聖期)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것은 두 사람이 같은 시대를 살아간, 문벌로 보면 같은 서인(西人) 출신인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김만중이 당쟁의 피바람이 부는 거리의 정치가였다면, 조성기는 골방의 병든 서생이었다. 김만중이 당대에도 유명 인사였다면 조성기는 당대에도 그저 몇 사람만 알아주는 사색가일 뿐이었다. 그림 /박성태·화가거리의 정치가와 골방의 병든 서생

김만중은 누구인가? 잘 알려진 대로 부친 익겸이 정축호란(1637)때 강화도에서 순절했기 때문에 유복자로 홀어머니 아래서 자랐지만, 그는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의 증손이었고 이조참판 윤지의 외손자였다. 형 만기(萬基)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이 되었고 조카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민씨였다. 이쯤 되면 그가 얼마나 대단한 핏줄을 타고 났는지 짐작이 간다. 김만중은 이 출신성분의 줄을 타고 과거를 거쳐 스물 아홉에 관직에 나가 서른 아홉에 동부승지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출세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효종의 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야기된 예송(禮訟)이라는 이름의 정치적 쟁투에서 그의 문벌이 속한 서인이 패하자 고난의 길로 접어든다. 그 후 그는 1692년 남해의 유배지에서 5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계 복귀와 유배의 길을 오르내렸다. '정치적 풍운아'. 좀 통속적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불러 주는 것이 그의 삶에 대한 적절한 수사일 것이다.

조성기의 삶은, 김만중과 비교한다면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다. 군수를 지냈던 시형(時馨)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과거에 나가 여러 차례 급제를 했지만 문제는 약한 신체였다. 정확한 병명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50년을 포의(布衣·벼슬 없는 선비)로 병들어 시골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남들에게 알려지지도 않았고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았다는 행장(行狀)의 기록을 보면 고질병이 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병 때문에 관직에 나가지 못한 것은 불행이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숙종실록의 졸기(卒記·중요한 인물을 평가한 글)는 그에 대해 경사(經史)를 두루 꿰고 있었으며 함께 변론을 하면 쏟아져 나오는 말이 찬연하고 조리가 있어 상대방이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당시 교류가 있었던 후배 학자 김창협(金昌協)·창흡(昌翕) 형제나 임영(林泳) 등으로부터 거유(鉅儒)로 추앙을 받은 학인이었다.

소설의 시대 17세기, 어머니라는 이름의 독자

이처럼 두 사람은 삶의 형식이 달랐다. 그리고 김창협 형제를 매개로 간접적인 접촉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될 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사람을 라이벌로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소설이라는 '자질구레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고전문학사에서 17세기는 '소설의 시대'로 불린다. 이 시기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많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척전(崔陟傳)' '주생전(周生傳)' '위경천전(韋敬天傳)' 같은 전기(傳奇)소설이나 허균의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엄처사전(嚴處士傳)' '장산인전(長山人傳)' '남궁선생전(南宮先生傳)' '장생전(蔣生傳)'과 같은 전계(傳系)소설이 이 시기에 창작되었고 김만중이 '구운몽'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조성기가 '창선감의록(彰善感義錄)'을 창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왜 17세기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을까? 여러 가지 문학사회학적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독자'야말로 소설의 시대를 연 주역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김만중이나 조성기는 소설의 작가이기 이전에 열렬한 독자였다. 아마도 이들이 열렬한 독자가 아니었다면 기존의 소설이 지닌 잡스러움과 엉성한 짜임새에 불만을 가지고 스스로 소설을 창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사대부 독자들 말고 더 관심을 가져야 할 또 다른 독자가 있었으니 바로 이들의 어머니로 대표되는 규방의 여성들이었다.

김만중이나 조성기가 왜 소설을 지었을까? 거기에는 분명 당대 정치 현실에 대한 우의(寓意)라는 숨겨진 목적이 있었지만 일차로는 소설을 좋아하는 어머니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만중은 효심이 지극해 모친을 위해 옛 이야기 책을 모아 밤낮으로 읽어드렸다. '구운몽'도 그래서 지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상식에 속한다. 조성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의 문집인 '졸수재집(拙修齋集)'을 보면 "태부인은 총명하고 슬기로워 고금의 사적(史籍)이나 전기(傳奇)를 모르는 것이 없었을 만큼 널리 듣고 잘 알았는데 만년에는 누워서 소설 듣기를 좋아해 잠을 그치고 시름을 쫓는 자료로 삼았다. 부군(府君·조성기)이 남의 집에 못 본 책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힘을 다해 얻었고, 또한 자신의 고설(古說)에 의거해 여러 책을 지어 드리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소설의 시대가 17세기에 열리고 조성기와 김만중이 서로 경쟁하듯이 소설을 써낸 것은 바로 이들의 어머니와 같이 소설을 좋아하는 사대부가의 부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선감의록 대 사씨남정기

조성기보다 김만중이 유명하듯이 '창선감의록'보다는 '사씨남정기'가 더 잘 알려져 있다. '사씨남정기'의 유명세에는 이 소설이 장희빈 사건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사실도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사씨남정기'가 '창선감의록'의 모방작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조성기는 17세기 후반에 중국 소설을 참조해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문벌 가문의 내부 갈등과 정국의 변화에 따른 화씨 가문의 흥망을 다룬 장편 소설을 내놓았다. 어머니의 시름을 위로하기 위한 효심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이면에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골방 선비의 비판이 숨어 있었다.

'창선감의록'은 화욱과 엄숭의 정치적 갈등이 화욱의 아들인 화진과 엄숭의 갈등으로 반복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예론(禮論)을 두고 벌어진 남인(南人)과 서인의 두 차례에 걸친 학문적 논쟁과 정치적 투쟁에 대한 우의였다. 예송 논쟁에서 남인은 왕의 예는 사대부나 서민의 예와 다르다는 논조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서인은 천하의 예가 같다는 주장으로 신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창선감의록'은 엄숭의 승리를 통해 현실에서 패배했던 서인의 공도(公道)·공치(公治)의 사상을 옹호했다. 조성기는 소설을 부녀자들이 좋아하는 흥미만이 아니라 '역사를 반추하는 거울'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창선감의록'에는 정치적 갈등 이외에도 어머니가 다른 두 아들 가운데 누가 후계자가 될 것이냐는 가문의 종통(宗統) 확립을 둘러싼 가문 구성원들 사이의 온갖 갈등,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가족간의 기이한 상봉, 악인에 대한 징치 같은 가문 내부 문제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씨남정기'는 바로 이 부분을 부각시키되 후계를 둘러싼 부인들 사이의 갈등을 처첩 사이의 갈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민비와 장희빈을 빗댄 양처(良妻) 사정옥과 악첩(惡妾) 교채란의 갈등의 드라마는 여기서 탄생한 것이다. 김만중은 남해의 유배지에서 장희빈의 왕비 책봉 소식을 들으면서 숙종에 대한 원망과 비판을 함께 담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체험하는 가상의 드라마를 창조한 셈이다.

조성기와 김만중은 한 사람은 거리에, 한 사람은 산림에 있었지만 임병 양란 이후의 흔들리는 사회질서를 국가적으로는 왕통의 확립, 가문 내적으로는 가부장권의 확립을 통해 재조직해야 한다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소설로 풀어내려 했던 두 사람의 교감과 선의의 경쟁이 17세기 소설사에 가문소설이라는 화려한 꽃을 피워낸 것이다.

조 현 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김만중

호는 서포(西浦). 1637년에 유복자로 태어나 1692년 56세로 유배지에서 별세했다. 어머니 해평 윤씨의 희생적 교육과 타고난 가문을 배경으로 승승장구했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여러 차례 정치적 굴절을 겪었다. 한시가 아닌 국문시가를 높이 평가한 민족어문학론을 주창하고, 통속소설의 예술적·교화적 기능을 평가해 '구운몽' '사씨남정기' 같은 장편소설을 썼다. 또 감정의 표현을 시의 본질로 여기는 연정설(緣情說)을 내세우는 등 시대를 앞서가는 문학관도 가지고 있었다. 문집으로 '서포집(西浦集)' '서포만필(西浦漫筆)' 등이 전한다.

● 조성기

호는 졸수재(拙修齋). 1638년에 태어나 1689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일찍이 사마시(司馬試·생원과 진사를 뽑던 시험)에 여러 번 합격했으나 고질이 생겨 사람들과 접촉을 끊고 성리학 연구에 전심했다. 학문은 20세에 이미 이황, 이이의 학설을 논변할 정도였다.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다가 말년에 김창협·창흡 형제와 벌인 시에 대한 논쟁을 통해 실력이 소문 났다. 김창협은 그를 대단한 유학자로 평가하면서 세상 사람들이 그를 몰랐던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문집으로 '졸수재집(拙修齋集)'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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