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최고의 밑천이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그 밑천 마련하기도 힘겨웠다. 1983년 9월 중순 권토중래를 결심한 나는 사람 끌어 모으기에 나섰다.쓸만한 사람은 찾기 힘들었다. 대단한 인재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사업이 번창할 때는 함께 일하고 싶다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빈털터리가 되고 나니 "같이 사업 해보자"고 해도 하나같이 등을 돌렸다. 한때 100개가 넘는 대리점과 30명의 직원을 거느렸지만 이젠 싹수가 노란 중늙은이 취급하기 일쑤였다. 세상 인심은 그렇게 각박했다.
게다가 나는 2억원의 빚이 있었다. 조직과 자금, 인력 등 사업의 필수 조건을 하나도 갖추지 못한 나를 세상이 멀리하는 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한달 쯤 지나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부산 애희 누나 집에서의 더부살이를 청산한 셈이다. 부산을 떠나면서 나는 애희 누나에게 세 번째 손을 벌렸다. 그리고 500만원을 손에 쥔 채 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 때 내게 한명의 동지가 있었다. 과거 회사 직원 박성민 과장이었다. 내 처지를 뻔히 아는 그는 돈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묵묵히 나를 따르기만 했다. 나는 사무실을 물색했다.
박 과장이 청계천 7가의 3.5평 짜리 골방을 소개했다. 말 그대로 골방이었지만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골방을 사무실로 개조해 '제2의 창업'을 선언했다. 회장 1명에 과장 1명이라는 초라한 새 출발이었으나 마음은 뿌듯했다. 그의 아내도 무보수로 나를 도와줬다.
어둡고 칙칙한 골방은 원래 최저생계비도 안 되는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재봉틀에 매달려 싸구려 옷을 만들던 곳이다. 전태일 열사도 멀지 않은 곳에서 일하다 분신 자살했다. 나를 찾는 고객들은 "무슨 사무실이 도둑놈 소굴 같냐"며 투덜댔다. 그래도 월세는 13만원이나 됐다.
나는 당시 "경영학은 경영현장에서만 배울 수 있다"는 일본 마쓰시타 그룹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말을 곱씹었다. 돌이켜 보면 첫 사업은 실수와 허점 투성이었다. 원래 셈에 둔감한 나는 돈에 무지했다. 하지만 첫 사업 실패는 비즈니스에 서투른 탓이지 알로에 자체의 실패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마쓰시타의 얘기처럼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현장에서 많은 걸 배우게 된다. 끝없는 도전 정신과 정열, 알로에에 대한 사랑이 넘쳐 흘렀던 나는 '비즈니스'만 보완한다면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고 믿었다.
새 출발을 준비하느라 100만원 정도를 쓴 나는 나머지 400만원으로 알로에를 사들이기로 했다. 내 농장이 없으니 재배자가 아닌 장사꾼이 됐다. 알로에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업자들이 줄줄이 도산, 판로가 막히는 바람에 어느 농장에나 애써 키워 놓은 알로에가 쌓여 있었다. 알로에는 정말 헐값이었다. 미국제 '베라겔' 이 리터당 3만원에서 2,000원 정도로 폭락하는 등 알로에는 제값의 10분의 1정도로 거래됐다.
무턱대고 사들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값싸고 좋은 물건도 팔 데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는 점을 터득한 터였다. 나는 적정량의 재고를 유지하면서 판매에 나섰다. 박 과장 부부가 열심히 방문판매에 나섰지만 신통치 않았다. 가뭄에 콩나듯 찾아오는 손님으로 연명한 날도 있었다.
'김정문'이 알로에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는 걸 알릴 방법도 없었다. 몇몇 기자들에게 연락을 해도 대부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매스컴에서는 이미 알로에는 한물간 진부한 품목이라고 비웃는 분위기였다. 막막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알로에 붐을 다시 일으키려면 돈은 있어야 했다. 그러는 사이 한 달이 지났고 박 과장은 총 매출이 150만원이라고 보고했다. 투자한 돈과 피 땀이 얼만데, 절로 한숨이 났다. 나는 또 한번 매스컴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그 길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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