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월 농장 처분과 동시에 나는 파산했다. 1983년 2월 때 일이니 스물 한해 전이다. 그 바로 몇 개월 전만해도 이 땅의 알로에 붐은 엄청났다. 동네 꼬마들도 알로에에 대해 떠들어대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특히 난치병을 고친 환자들에겐 알로에가 복음이나 다름 없었다.그런데 너무 허무했다. TV와 신문은 나의 몰락을 덤덤하게 전했다. 사람들은 "잘 나가던 김정문이 망했다"고 쑤군댔다. 보는 이들 마다 알로에 사업은 다시 성공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은 "한번 다른 사업을 알아보라"는 말과 함께 하나 둘 내 곁을 떠났다.
빈털터리가 된 내게 "당신 때문에 빚더미에 앉게 됐다"며 가슴에 채찍질을 해대는 지인도 더러 있었다. "TV에 나가 잘 난 척 하더니 꼴 좋다"는 비아냥이 귓가를 맴돌 때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내겐 아무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점차 잊혀졌다. 유일한 낙은 산행이었다. 3월 중순 남한산성 골짜기에는 산수유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진달래가 아닌 산수유가 필 때면 재기할 것"이라고 격려해준 시인 장순하 선생이 절로 생각 났다. 나도 모르게 "장 선생, 산수유 꽃은 만발했는데 나는 망해 버렸다"고 중얼거렸다. "꽃피는 봄이 문턱에 와 있다. 겨울을 이겨내려는 용기만 있다면…"이라는 도산 직전의 메모는 "삭풍(朔風)에 맨몸이 아린다"로 바뀌었다.
나는 장 선생을 찾아갔다. 그는 "알로에에 대한 사랑과 집념을 버리지 않는다면 김 선생은 또 한번 기적을 일으킬 자질이 충분하다"고 격려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러나 공허하게 들리기도 했다. 내 나이 55세였다. 기적이 두 번 일어날 수 있을 까 하는 회의를 떨치기란 쉽지 않았다.
삶도 다시 팍팍해졌다. 사회 단체에 몇 천만원씩 기부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끼니를 걱정하는 신세로 돌아갔다. 명망 있는 사업가에서 하루 아침에 백수가 된 심정은 경험자만이 안다.
그러나 가끔 바보스러울 정도로 낙관적인 나는 역경 속에서도 극장을 찾곤 했다. 달리 마땅히 갈 곳이 없던 까닭도 있었다. 영화 미드웨이를 본 기억은 지금도 또렷하다. 하와이 서북방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려는 일본의 대함대를 소수의 미국 해군이 격파한다는 내용이다. 절대 열세의 미국 함대는 지혜와 처절하다고 할 만한 용기로 승리했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나는 "하느님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는 사이 봄날은 갔다. 상황은 결코 호전되지 않았고 서울 생활은 갈수록 버거웠다. 나는 부산 동래의 애희 누나 집으로 내려갔다. 83년 6월 초다. 원래 우리 형제는 2남 6녀였지만 그 때는 나와 애희 누나만이 남았다. 나머지는 요절하거나 마흔을 넘기지 못한 탓에 애희 누이는 유일한 형제였다.
애희 누나는 그 때도 매형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다. 어려울 때마다 내게 힘이 되어준 든든한 후견인이었다. 누이는 따뜻하게 대해줬다. 그렇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누이 집에서 더부살이 하는 심정은 비참했다.
나는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 들고 버스비만 손에 쥔 채 무작정 누이 집을 나섰다. 해운대 바닷가와 태종대, 그리고 이 산 저 산을 누볐다. 알로에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초등학교 동창 정길금의 농장을 찾기도 했다. '알로에 건강법'을 구하기 위해 샅샅이 뒤진 광복동의 외국서적 골목도 옛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 나의 재기를 도와줄 사람은 애희 누나 말고는 없었다. 만날 면목도 없었지만 찾아가면 피하는 지인들도 있었다. 부산에 내려온 지 세 달이 지났건만 내 안부를 묻는 이는 드물었다. 지독한 외로움 속에 과거를 되돌아 보면서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는 오기가 생겨났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살아났는데 이까짓 난관쯤이야 하는 자신감이 꿈틀댔다. 다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초가을 바람이 불어대는 83년 9월 중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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