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는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전통 입성. 갈수록 형태가 다양해지면서 애호층도 두터워지고 있다.누비 가운데서도 최고의 명품 누비는 당연히 누비장(중요 무형문화재 107호 누비 공예 보유자) 김해자(51)씨가 만든 누비옷이다. 그가 만든 두루마기 한 벌은 모피 코트 한 벌 값과 맞먹는다. 한복 값도 그에 육박한다. 그가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국무총리상을 탄 두루마기와 한복 한 벌은 한복연구가 이영희씨가 1,700만원에 구입했을 정도이다. 누가 모피코트보다도 비싼 누비 외투를 고를까. "왜 안골라요? 다같이 따뜻한데 모피코트는 무겁지만 누비옷은 가볍잖아요." 김씨의 제자인 김은주(26)씨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이 말한다. 김씨가 만든 누비옷은 바늘땀이 매우 정교하여 수많은 점이 찍힌 듯할 뿐 만져보면 한줌에 쥐이듯 옷감의 부드러움이 살아있다.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가 바늘을 든 지 30여년만에 두 손으로 일가를 이뤄냈으니 누비만한 벤처가 없다. 그런데도 그는 남들이 명품 외투를 비싸게 사주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다들 옷을 직접 지어입는 문화를 널리 퍼뜨리고 싶다. 누비 바느질을 하면 우리 전통의 철학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는 경주와 서울을 오가며 그가 30여년 동안 익힌 누비 바느질의 모든 것을 교육에 쏟아 붓고 있다.
누비는 몽골지방에서 유래했다는 보온형 바느질 방법. 우리나라에는 조선시대 출토 복식 유물의 절반이 누비일 정도로 많이 쓰였으나 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계속 땀을 떠야 하는 작업이 워낙 힘들다 보니 재봉틀의 등장과 함께 손바느질은 거의 사라져버렸다. 승복에나 간신히 살아있던 누비의 맥을 일반 복장에도 다시 계승시킨 이가 바로 김씨이다.
그도 처음에는 보통의 한복 바느질로 시작했다. 일본 와세다대에까지 유학한 아버지가 주색으로 집안의 재산을 거덜내고 돌아가신 뒤 그의 일가는 먹고 살기 위해 1970년 서울로 올라왔다. 점잖은 집안 여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당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바느질이 최상급이었다. 그도 삯바느질을 하는 어머니 곁에서 바늘을 들었다. 서울의 동대문 시장 근처에 있던 선미 복장학원에서 한복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바느질에 재질이 있었던지 72년부터 서울의 이름난 주단집 한복은 대부분 하청 맡기 시작했다. 인사동의 백조주단이니 종로의 한국주단이니 하는 곳들의 한복을 그가 바느질했다.
하지만 한복 바느질은 근근히 먹고 살 정도의 일이었다. 그도 20대에는 바느질을 그만 두려고 방황도 많이 했다. 바늘 하나만 들고 전국을 방랑하기도 했다. "바느질 할 줄 아는 사람이 참 좋다. 바늘 하나만 있으면 세계 어디로도 여행할 수 있다. 한 집에 머물며 옷 지어주면 밥 먹이고 잠도 재워준다"라는 그는 정말 그런 방법으로 80년부터 83년까지 전국을 떠돌았다. 제주의 양로원에 6개월간 머물며 노인들의 옷을 지어주기도 했고 경봉 스님(1892∼1982) 타계 직전 1년간은 경남 양산 통도사에 머물며 스님의 옷공양주 노릇을 했다. 충북 천안 성불사,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도 지냈다. 거기서 그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승복에 쓰인 누비의 매력과 '바느질이야말로 업을 쌓지 않는 일'이라는 깨침이었다. "직업이 나쁜 습관을 만드는 수가 많은데(그는 이것을 업이라고 불렀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깨끗한 일이 바느질이었다. 똑 같은 작업을 공들여 하는 누비는 사람 만나기 싫어하고 똑 같은 일을 좋아하는 내 적성에 맞았다." 그는 승복을 만드는 황신경(74·경북 문경)씨에게 누비의 대강을 익힌 후 한복 복식유물을 찾아내서 일상복에 누비를 되살리는 방법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누비는 천을 일정한 간격으로 홈질하는 단순한 작업이다. 그러나 그 작업은 만만치가 않다. 누비질의 간격에 따라 잔누비(3㎜간격) 세누비(5㎜) 중누비(2.5㎝ 이상의 드문 누비) 등으로 나뉘는데 8폭 치마를 세누비로 만든다고 해도 8갽38은 3045㎝이니 608줄을 누벼야 한다. 누비기 전에 줄을 긋는 데서 이미 지칠 정도이다.
누비 줄은 바느질 전에 초크로 그리거나 다리미로 자국을 내주어야 한다. 김씨는 "광주 이씨 출토복식(유물 114호)을 92년 재현하기 위해 무명천에 다리미로 누비자국을 냈더니 굳은 살이 석달을 가더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그런 고되고 단순한 작업이 좋았다고 한다. 전통 유물을 재현하면서 그의 누비 양식은 점점 더 세련되어갔다.
80년부터 누비옷을 만들면서 그는 획기적인 누비질 방법을 찾아냈는데 희한하게도 그것이 전통과 딱 맞아떨어졌다.기계누1비에 밀려 단절되고는 문헌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조선시대의 누비 기술을 재발견한 것이다.
그 첫째가 올 튀기기. 누비할 자리를 잡기 위해 눈빠지게 올에 줄을 긋다가 그는 올 한 줄을 살짝 당겨주면 무늬가 어긋나면서 누비할 선이 그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85년이었다. 너무도 신기해서 단국대 석주선박물관의 박성실 연구원에게 달려갔다. 현미경으로 유품을 관찰했더니 과연 그 방법을 선조들도 쓰고 있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100년동안 못하고 있었구나! 김씨는 "불교서적 '신임제록'에 보면 '지도지난 유형간택'(至道至難 有形簡擇)이라는 말이 있다. 어렵다, 쉽다는 어렵고 쉬운 것을 가르는 데서 생겨난다는 말이다.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들여다보면 단순함으로 들어가고 그 단순함 속에서 해법이 나온다. 사람들이 단순함으로 가면 도를 통하는데 복잡하게 생각해서 진리를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 올 튀기기를 발견한 후부터는 어떤 정교한 누비도 재현이 쉬워졌다. 현재는 그의 제안으로 아예 올을 튀긴 천이 생산되고 있다.
그가 두번째로 발견한 것은 양면누비 기법. 그는 87년부터 누비를 단을 치지 않고 걷어올리는 방식으로 만들어 양면누비 옷을 만들고 있다. 옷을 뒤집어도 입을 수 있어 누비옷 한 벌을 사면 두 벌 산 효과가 난다. 이 같은 방식은 그래서 오랫동안 '김해자식 누비'로 불렸다. 그런데 2001년 11월 경기 양주군의 해평 윤씨 묘역에서 소년 미라가 나왔는데 그가 입은 두루마기에서 바로 이런 양면누비 기법이 이미 350년전 조선조 때 있었다는 것이 새롭게 밝혀졌다. 누비에 도가 튼 명인은 어느 시대에 살든 같은 방식으로 최상의 세련됨을 추구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그래서 김해자식 누비라는 이름이 없어졌다"고 김씨는 껄걸 웃는다.
그는 "누비는 옛사람들이 자녀의 무병장수와 전쟁에 나간 지아비의 안위를 기원하며 기도하듯 만든 옷이다. 누비를 남이 만들어주는 명품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입는 명품으로 삼으라"고 권했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기계누비는 뻣뻣… 손누비가 더 따뜻
시중에 나와있는 누비 제품은 대부분 기계누비이다. 심지어 '손누비'라는 상표의 기계누비도 있다.
손누비와 기계누비는 구분이 쉽다. 재봉틀로 박은 기계누비는 박음질처럼 실선이 계속 이어져 줄이 골진 것이 특징. 골과 골 사이가 뚜렷하다보니 옷이 다소 뻣뻣하다.
반면 손누비는 홈질이라 바느질땀이 나타났다 들어갔다 하기 때문에 촉감이 부드럽다. 입었을 때도 옷이 결리거나 각이 지거나 하지 않고 몸에 잘 감긴다. 바늘땀 사이가 막힌 기계누비와 달리 손누비는 바늘땀 사이로 공기가 흘러 더 따뜻하게 입을 수 있다.
●서울·경주서 가르쳐 2월강좌 17일 개강
김해자씨는 서울의 누비문화원과 경주공방에서 누비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1년에 2학기, 매학기는 5개월 과정이며 2월과 8월에 개강한다.
초급반 1학기에는 숄 애기조끼 배냇저고리 두렁치마 개량조끼를 배우며 2학기에는 여아 저고리 남아 저고리 풍차바지 답호 아이배자조끼를 배운다. 이어 중급반과 고급반에서는 당의나 두루마기 같은 고난이도의 한복도 가르친다.
올해부터는 교육부가 학점을 인정하는 교육기관이 되어 독학사 자격증을 받는데도 활용할 수 있다. 김씨가 직접 가르치며 서울이나 경주 가운데 가까운 장소를 고르면 된다.
2월 강좌는 17일 개강한다. 서울 누비문화원(02-723-1330) 경주공방(054-775-2631)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