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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획일화에 길들여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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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획일화에 길들여진 사회

입력
2004.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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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럽에 나갈 일이 있으면 스타킹을 사온다. 이 무슨 사치스런 행동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제품의 가격도 저렴하지만, 내가 그곳에서 구매하는 진짜 이유는 차등화한 사이즈 때문이다. 한국에서 스타킹은 한 개의 사이즈뿐이다. 대다수 한국여성들은 TV에 나오는 날씬한 탤런트에게나 맞는 고탄력 스타킹에 억지로 몸을 맞추고 살아야 한다. 몸에 대한 사회의 통제이며 학대이다. 이런 일들은 일상생활 속의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우리 현실을 잘 보여주는 거울이다.어디 그뿐인가. 시장에 나가면 유행을 타지 않은 물건을 찾기 어렵다. 한참 미니스커트가 유행하던 시절, 나는 치마를 사지 못하거나 어쩌다 실버 코너에서 재수 좋게 내게 맞는 적당한 길이의 상품을 발견하곤 했다. 그러나 유럽에 가면 백화점의 대부분 코너는 보통 많이 입는 스탠더드 디자인을 판매한다. 구석의 한 코너에 가야 최신 유행의 디자인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사회 여성의 옷차림이나 화장은 대단히 인공적이면서 획일적이다. 시장과 자본은 구매자에 대한 인간적 배려는 없고, 스스로 유행을 창출하여 대중을 지배하면서 이윤을 극대화한다. 더 심각한 것은 어느 한국여성도 여기에 불평하지 않고 적응하면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획일성은 단지 여성의 외모만을 규제하는 게 아니다. 온 국민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광하던 월드컵 대회 때를 기억해 보라. 축구경기 관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나는 월드컵 기간 집에서 TV채널을 돌려보았으나, 축구경기를 중개하지 않은 공영방송이 없었다. 우리의 획일성이 지니는 천박함을 거기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축구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다른 프로를 볼 수 있는 선택권이 부여되어야 했다.

이런 획일성은 정치권에도 팽배해 있다. 한 정당이 어떤 참신한 정강정책을 내놓으면 다른 정당이 유사 안을 내놓고, 그래서 정책정당의 차별성은 사라진다. 거기에다 약속한 정책마저 실천하지 않으니 기성정당은 국민에게 후안무치의 집단으로 비친다.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형성된 군사주의 문화와 획일주의는 맞닿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최근 드러나는 흥미 있는 현상은 이런 획일주의가 양분화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라크파병 문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노사문제, 부안 핵폐기장 문제 등 모든 사안마다 여론은 양분되었다. 각각은 자기의 주장을 한치도 조정하지 않고, 상대방은 천인공노할 집단이 된다. 양자 사이에서 합리적인 제3의 대안이나 다양한 절충안은 거의 수용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양분화한 획일주의는 국민을 불안하게 할 뿐 아니라, 한 단계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데에 걸림돌이 된다. 거기에다 지배엘리트에 대한 국민의 뿌리 깊은 불신이 부가되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근의 다양한 집단행동에서 드러나는 대로 국민이 불만이나 요구를 표현하는 방법도 극단적이어서 염려스럽다.

우리는 1960년대의 가난과 70, 80년대의 군부독재, 그리고 군사주의 사회에서 이제 간신히 빠져 나오고 있다.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어 선진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국민소득을 몇 천 달러 더 올리는 것 못지않게 성숙한 국민의식이 필요하다.

지난 몇 년간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와 같은 여성평화운동단체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고 있는 '갈등해소와 관용교육'이나 최근 들어 국무총리 산하 지속가능발전위원회가 갈등조정 기능을 활성화하려는 계획 등은 이런 노력의 일환이다. 민간단체나 정부기구의 노력에 더해 우리 공교육에 평화교육 커리큘럼을 도입해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정하고 상생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노력이 더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정 현 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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