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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12> 끈질긴 설득 먹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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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12> 끈질긴 설득 먹히다

입력
2004.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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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겨울은 가혹했다. 분말 알로에에 한 가닥 희망을 건 나는 보건사회부 설득에 나섰다. 당시 보사부장관은 김정례씨였다. 나는 장관 주변 인물을 살펴봤다. 뜻밖에도 그녀는 윤보선 전 대통령 계보로 분류됐다. 강원룡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빛이 보이는 듯 했다.82년 말 시작된 설득은 83년 2월 중순 마침내 성공했다. 그러나 보름도 지나지 않은 2월말 반월 농장이 넘어갔다. 분말 알로에도 나의 몰락을 막지 못했다. 그만큼 이 땅의 알로에 시장은 재기불능의 상태였다.

설득 과정에서 나는 많은 걸 배웠다. 쇠락의 길에 빠진 사업을 되살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학문적 근거와 논리, 난관을 돌파하는 강인한 추진력이 있다면 행정 당국과의 싸움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경험과 자신감을 얻었다.

나는 먼저 윤 전대통령의 부인 공덕귀(97년 작고) 여사를 찾아갔다. 공 여사는 내 고향인 경남 통영 출신으로 어릴 때부터 아는 사이다. 한신대 교수를 지낸 그녀는 목사가 되고자 했던 나를 무척 아꼈다.

강 목사도 만났다. 나보다 열살 위인 그는 51년 봄 부산에서 기독교 청년운동을 하면서 가까워졌다. 그는 알로에를 복용한 뒤 육체와 정신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변한 내 모습을 생생히 목도한 분이다. 한 강연회에선 "김 회장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은 정열로 알로에 분야를 개척했다"며 "알로에를 돈벌이가 아닌 이웃 사랑의 수단으로 여기며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업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김 장관을 소개해 달라는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면담은 쉽게 이뤄졌다. 내 설명을 경청한 김 장관은 즉각 차관과 담당 국장을 불러 "김 회장은 정직하고 성실한 분이니 말씀을 나눠 보라"고 지시했다.

나는 파스퇴르 연구소와 미국 소련 일본의 명문 대학 의·약학 박사들이 쓴 100개가 넘는 연구 논문을 근거 삼아 알로에의 효능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들은 "김 회장처럼 방대한 양의 학문적 증거를 제시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호의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과장과 계장 등 실무진의 반응은 썰렁했다. "보건 관계법에는 의약품과 식품밖에 없는데 알로에는 어느 쪽으로도 분류될 수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매일 찾아가 "알로에는 인류를 위한 복음이다. 법이란 잣대로 금하는 건 행정 당국이 역사 발전을 방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그들은 장·차관 지시도 있는데다 내 집념에 압도됐는지 일단 식품 학자 모임인 보사부 자문단을 소집, 판정을 받아보자고 했다.

나는 자문단 30명의 명단을 입수했다. 그리고 졸고 '신비한 약초 알로에'에 추천사를 써준 홍문화 서울대 교수와 유태종 고려대 교수의 도움을 받아 16명과 접촉했다. 초조하고 긴박했지만 분말 알로에는 '식품' 판정을 받았다.

안도는 한 순간이었고 더 큰 난관이 기다렸다. 보사부 식품 연구소의 실무 심사가 끝나야 비로소 허가가 난다고 했다. 당시 연구소 책임자는 공평무사한 인물로 유명했다. 나는 열심히 설명했지만 껍질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짐짓 화를 내며 "연구소 정문에 창조를 강조한 플래카드가 걸려 있더라. 그런데 사무실에는 100년도 넘은 일본 메이지 시대의 문헌이 꽂혀 있다. 그런 문헌을 토대로 알로에를 재단하는 일은 역사 발전에 제동을 거는 관료주의적 작태"라며 정공법을 택했다.

책임자가 다소 당황한 빛을 보여 고삐를 더 바짝 죄었다. 인삼은 농산물이지만 가공해 인삼차를 만들면 식품이다. 또 한의사가 약초로 쓰면 의약품이다. 농산물인 감귤도 통조림은 식품이고 비타민C로 만들어 팔 땐 의약품이 된다. 알로에도 마찬가지다. 농산물도 가공식품도 될 수 있고 앞으로는 의약품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2개월 가까운 논리싸움 끝에 나는 '불가' 판정을 뒤집고 장관의 명판이 찍힌 합격이란 공문을 받아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고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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