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복 영화의 변화한 때 한국영화의 제복은 까만 양복이었다. '친구'의 성공 이후 '조폭 마누라' '네발가락' '패밀리' 등 조폭영화는 양산됐고, 비난의 수위가 높아지자 영화계는 합법적 폭력을 필요로 하게 됐다. 그 대안이 막가파 스타일의 형사 이야기 '와일드 카드'였다.
고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편입한 조폭 두목의 얘기를 그린 '두사부일체'를 기점으로 조폭과 학교라는 소재가 결합된 이후, 학교영화도 쏟아지기 시작했다. 제복이 갖는 규칙성과 규율성만큼 그것을 깨뜨리려는 욕구도 커지게 마련. 그래서 교복를 입은 주인공은 제복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파격적인 말과 행동을 쏟아냈다. 대학생에게 고용된 여고생 노예를 그린 '내 사랑 싸가지'에서 여고생들은 "벌써 잤어?" 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술 마시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교복으로 은폐된 성숙한 육체의 매력을 은근히 보여 주면서 관객의 '롤리타 콤플렉스'를 은근히 부추긴다. 교복영화 속 주인공의 교복이 대부분 육체의 매력을 돋보이게끔 '개조' 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제는 군복이다.
80년대 초, 군복을 입고 대학가를 활보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군복이란, 당시 지배 세력의 상징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청산 후 군복에 대한 편견은 희석됐지만, 이것이 구체적으로 영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요즘 일이다. '실미도' 와 '태극기…'는 20년이라는 시차 뿐 아니라 영화의 정서에 있어서도 확연한 차이를 지닌 영화지만, 두 영화 모두 군복을 입은 자는 '절대 권력의 희생자'로 묘사된다.
조희문 세종대 영상학부 교수는 현재 답답한 정치 상황이 이런 군복 영화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지지도를 높여주는 요인이라고 해석한다. "두 영화는 시대, 주제와 소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희생당하는 약자의 입장을 공통적으로 보여준다. IMF 시대에 '친구'라는 조폭영화가 뜨고, IMF시대보다 더 어렵다는 노무현 정부에서 '실미도'가 크게 흥행하고 있다는 것은 관객들이 누군가를 향한 공격성의 창구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소영 영상원 교수는 두 가지로 해석한다. 첫째 과거사에 대한 해원(解怨)론.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이제 역사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됐다. 역사의 외상(트라우마)이 가졌던 한(恨)을 한 판 굿을 통해 풀려는 것이다."
둘째 한 풀이의 허전함이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영화에서 한풀이를 하는 방식은 '부잣집 굿판' 같다. 전쟁이란 스펙터클함을 강조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는 게 아니라 재연하고 있을 뿐이다. '실미도'는 70년대를 '군부'를 빼고 독재만을 이야기하면서, 마치 모든 원죄를 중앙정보부가 안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본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군부 독재에 일조한 남성들은 이런 영화를 보면서 심리적 면죄부를 부여 받는 셈이다."
군복 영화가 '초법적 폭력'을 가능케 한다는 것은 이런 소재가 대작 오락 영화가 되는 요인이기도 하다. '실미도'나 '태극기…'에서 구현되는 폭력성은 그 어떤 한국 영화보다 강도가 세지만, 그 폭력이 국가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이 설 때는 어떤 비판도 '무장해제' 시킬 수 있다. 제복은 한국영화에서 또 다른 '판타지'가 됐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 어떻게 만드나 영화속 제복
영화 속 군복 제작과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냥 어디 남아있거나 현재 사용중인 것을 대충 손질하는 것이 아니다. 의상팀이 시대와 계급과 계절에 맞게 철저한 고증을 거쳐 디자인한다. 원단을 자르고 박음질하는 등 군복 한 벌을 완성하는데 2주일이나 걸린다. 그러나 진짜 고생은 이 다음부터. 바래고 오래된 느낌을 주기 위해 새 옷을 사포질하는 데 무려 2시간, 이어 흙 바닥에 문지르는 것이 또 1시간이다.
'실미도'의 경우 모두 550여벌의 군복이 들었다. 안성기 허준호 등 극중 기간병이 입었던 얼룩무늬복, 설경구 정재영 등 훈련병이 입었던 무늬 없는 훈련복, 그리고 북한 침투용 위장복 등 가지가지다. 이것들을 모두 여성인 의상팀 5명이 직접 만들었다.
한 벌 당 제작비는 원단비 3만원 포함해 23만원. 의상팀 신승희(31)씨에 따르면 여성 5명이 2시간 동안 사포질을 하고도 원하는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지 않아 가차없이 흙 바닥에 문질러야 했다. 그것도 '벅벅'.
빨래도 진짜 힘들었다. 촬영장인 실미도에 수돗물이 안 나오는 바람에 공수해간 세탁기도 무용지물이었다. 진흙탕에서 흙 범벅이 된 군복을 한 가득 품에 안고 산 하나를 넘어가야 했다. 우물이 그곳에만 있기 때문이다. 신씨는 "촬영기간 5개월 내내 거의 이틀에 한 번 꼴로 밤새 손빨래를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사포질하면서 먹은 먼지만 한 양동이는 차고 넘칠 것"이라고 말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여기에 1950년대라는 시대와 4계절 촬영이라는 변수가 덧붙여졌다. 초대형 블록버스터답게 영화에 등장한 군복만 1만9,000여벌, 군화가 1,000여켤레. 이 많은 군복을 의상팀 6명이 만들었다. 대규모 전투신이 4번이나 나오기 때문에 총알 맞은 곳, 파편 튀긴 곳에 정확히 구멍을 내고 빨간 색 물감을 칠하는 작업에 엄청난 시간이 들었다.
이에 비해 영화 속 교복은 상당히 수월하게 '탄생'했다. '내 사랑 싸가지'의 경우 학생복 브랜드를 가진 (주)엘리트베이직이 고교생하복 50여벌을 협찬했다. 영화 속에 자사 제품을 노출시켜 광고효과를 노리는 PPL(Product Placement)인 셈. 하지원의 교복은 좀 더 발랄하고 섹시하게 따로 제작됐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손예진 조인성 주연의 영화 '클래식'에 나왔던 교복을 엑스트라용으로 구입해 쓰고, 주연 배우들의 교복은 따로 제작했다. 모범생 권상우는 일(一)자바지, 학교 짱인 이정진은 나팔바지 등 캐릭터마다 교복 스타일을 달리했음은 물론이다. 여주인공 한가인의 교복이 꽉 쪼여서 섹시해 보였던 것은 전반적으로 몸에 달라붙었던 1970년대 말 여학생 교복의 유행을 반영한 것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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