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 영화 '스팅' (The Sting)은 1974년 아카데미상 작품상 등 7개 부문을 휩쓴 오락영화다. 시카고 암흑가의 건달과 도박사가 친구를 죽인 갱 두목을 대박을 미끼로 경마 판에 유인, 치밀한 사기극의 함정에 빠뜨려 FBI에 체포되게 하고 거금을 챙긴다는 줄거리다. 스팅은 바로 함정을 뜻한다.1995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던 유엔 사찰단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 영웅 압둘 카디르 칸이 이라크에 핵 기술 지원을 제안했다는 이라크 정보부의 비밀 문건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라크의 설명은 엉뚱했다. 90년 10월 작성된 문건에 기록된 제안 자체를 '스팅'으로 판단해 무시했다는 것이었다. 파키스탄 정부도 터무니없는 사기극이라고 일축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권의 유일한 핵 보유국이다. 공식 핵 보유는 1998년 5월 이웃 인도와 잇달아 핵 실험을 하면서지만, 70년 대 개발에 착수해 80년 대 이미 핵 능력을 갖췄다. 파키스탄의 핵은 플루토늄 대신에 고농축 우라늄(HEU)을 이용한 구식이다.
파키스탄이 일찍 핵 선진국 대열에 낀 것은 오랜 적대관계인 인도에 맞서는 국가 생존 전략이다. 그러나 끊임없이 핵 확산 우려와 의혹의 대상이 됐고, 이를 상징한 것이 이른바 '이슬람 핵 폭탄' 경고다. 사우디와 리비아 등이 재정지원을 한 것과 관련, 핵 기술이 이들 이슬람 형제국에 이전돼 중동 등 지역 정세를 뒤흔들 것이란 우려였다.
여기에 단골로 등장한 것이 사우디와 이란이다. 주로 얼굴 없는 정보 소식통에 근거한 핵 거래설은 모두 흑색 선전으로 결론났다. 미국이 통제하는 사우디가 독자 핵 보유를 꾀하기는 어렵고, 이란은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과 영향력을 다투는 사이다. 이런 거짓 선전의 배후에는 파키스탄의 핵 개발을 견제하려는 인도와 이스라엘 등이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유념할 것은 파키스탄의 핵 개발은 냉전시대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은밀한 지원으로 이뤄진 사실이다. 소련 중국 인도와 접경한 파키스탄은 이들을 견제하는 데 요긴한 나라였고, 특히 80년 대에는 소련의 아프간 개입에 맞선 미국의 대리전에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 서유럽과 캐나다 기업들이 원심분리기 등 우라늄농축 설비를 파키스탄에 수출하고, 사우디가 줄곧 핵 개발 자금을 지원한 것은 모두 이런 배경에서다.
압둘 카디르 칸은 유럽에서 핵 전문가로 일하다가 1971년 귀국, 76년 우라늄농축기술 개발의 중심인 칸 연구소를 설립해 핵 개발을 주도한 국민적 영웅으로 부각됐다. 그러나 전문가적 지식과 실제 기여는 늘 논란됐고, 인도 정보기관도 그를 서방과의 비밀 거래책으로 간주했다고 한다. 그는 90년대 이후 미국이 규제를 강화하자 중국에서 핵 설계를 얻는 일을 맡았고, 핵 운반용 미사일을 중국 북한에서 도입하는 데도 핵심 역할을 했다.
이런 인물이 이란 리비아 북한에 우라늄농축 기술과 장비를 몰래 제공한 죄상을 공개 시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 FBI와 영국 MI6 등이 칸의 핵 밀매조직에 침투, 여러 해 추적한 끝에 증거를 잡았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이에 따라 당장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 계획이 사실로 드러난 점이 부각된다.
그러나 파키스탄과 인도 언론 등의 시각은 크게 다르다. 국제 언론이 영웅의 전락과 핵 확산에 초점을 맞추지만, 20년간 칸이 저질렀다는 핵 기술 암거래가 이란 리비아 북한 등에 이렇다 할 결실을 안긴 사실이 없는 점을 주목하라는 것이다. 또 미국이 밀매조직이라고 주장한 유럽과 중동 등의 기업은 칸이 서방에서 핵 설비를 도입한 곳들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점에 비춰 미국이 파키스탄을 압박해 자신들의 오랜 대리인 칸을 희생양 삼은 것은 북한 핵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의도보다는, 중국의 핵확산을 견제하고 냉전 종식으로 전략 가치가 달라진 파키스탄의 핵 능력을 위축시키는 것이 주목적이라는 분석이다. 칸과 파키스탄이 함정에 빠졌다는 얘기다.
강 병 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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