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만화 '드래곤 헤드'에는 충격적인 도입부가 나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즐거운 수학여행길, 느닷없이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진 것이다. 때마침 투하된 핵 폭탄으로 아이들을 태운 신칸센은 터널 안에 처 박히고 몇 명의 살아남은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세상과 가족과 단절된다. 따뜻했던 침대와 늘 다독여줬던 식구들과. 영화 '콜드 마운틴'도 광풍처럼 휘몰아친 전쟁으로 생이별을 한 연인의 강렬한 사랑 이야기이다. 그것도 최소 10권 이상의 대하장편 전집 스타일의 로맨스다. '잉글리시 페이션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새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밤새 누군가를 그리워하다 아침에 가슴 저린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갈 때 어떤 말을 할 수 있습니까."남북전쟁 발발 직후인 1863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한 시골마을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감독이 그 드넓은 미국 땅에서도 찾지 못해 루마니아까지 가서 촬영한 아름다운 목가 풍경. 그곳에서 목수로 일하는 남자주인공 인만(주드 로)과 목사의 딸 아이다(니컬 키드먼)는 운명처럼 만난다.
그러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지는 법. 인만의 참전으로 아이다는 혼자 남고, 두 사람은 몸서리칠 정도의 그리움 속에서 각자 변화한 삶을 감당한다. 세상물정 모르던 아이다는 억척스러운 산골처녀 루비(르네 젤위거)를 만나 혼자 사는 법을 배우고, 인만은 동료의 죽음과 몇 번의 죽을 고비를 거치며 아이다를 만나기 위해 탈영을 감행한다.
영화가 볼 만해지는 것은 이때부터. 초반에 나왔던 할리우드식 전쟁 장면은 사라지고, 영화는 오로지 증오로 가득찬 세상과 두 남녀의 증폭되는 그리움에만 집중한다. 탈영병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장난치듯 사람을 죽이는 의용대, 큰 부상을 당한 후에도 "난 반드시 사랑하는 아이다에게 돌아갈 거예요"라고 울부짖는 인만. 기어코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서조차 산파식 감정표현을 없앤 감독의 자제력도 놀랍다.
영화는 전미(全美)도서상을 수상한 찰스 프레지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감독 시드니 폴락이 제작을 맡았다. 지난달 열렸던 골든 글로브 8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자 6일(한국시간) 시작된 베를린영화제 개막작. '리플리'로 올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주드 로, 이 영화로 골든 글로브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르네 젤위거의 연기가 눈길을 끈다. 금발의 니컬 키드먼 역시 여전히 아름답다.
끝으로 사족 하나. 왜 전쟁이 나면 민간인이 더 사나워지는 걸까.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주인공 진태(장동건)의 약혼녀(이은주)를 죽인 것도 민간 방첩대원이고, 이 영화에서도 인만은 탈영병을 색출하는 민간 의용대원에게 총 맞아 죽는다. 이것이 전쟁의 광기라는 것일까. 15세 이상. 20일 개봉.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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