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100억원 시대에도 10억 남짓으로 제작되는 저예산 영화는 소중하다. 영화가 감독의 은밀한 상상력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저예산 영화를 통해서일 것이다. 박경희, 김응수 감독의 저예산 영화는 감독 예술, 영화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작품이다.
박경희 감독의 '미소'는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배반하는 영화다. '미소'의 주인공 소정(추상미)은 착하지도, 예쁜 척 하지도, 섹시하지도 않으며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여성이다. 소정은 남성이 만든 규칙이 아닌 자신의 욕망을 유일한 척도로 삼는다.
전통적인 남성의 시선으로 찍은 영화에 길들여진 관객이라면 화장기 없이 제멋대로 사는 소정의 삶을 따라가기가 조금 버거울 것이다.
사진작가인 소정은 시야가 튜브처럼 점점 좁아지는 희귀 안구병인 튜블러 비전(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는다. 갑작스레 실명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말에 소정은 애인 지석(송일곤)과의 유학 계획도 없던 것으로 하고 헤어질 것을 결심한다. 소정은 절망적인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지만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다스리러 간 고향집에서는 사소한 이유로 오빠와 다투고, 애인에게는 단절감을 느낀다.
소정은 경주 고분을 촬영하다가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다는 열망을 느낀 뒤 비행 강습소를 찾는다. 소정이 혼자 비행기 시동을 걸고 하늘로 도약하는 순간, 조용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서투른 조종술 탓에 비행기와 함께 추락하는 장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부서진 비행기 날개 위로 올라가는 장면은 아무런 수식 없이 전하는 진심이 느껴진다.
여성의 자아 찾기에 대한 진지한 시선이 돋보이는 영화로 밴쿠버 영화제 용호상 부문, 토론토 영화제 크리틱스 초이스 등 여러 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세 친구'를 각색한 박경희 감독의 데뷔작이며, '세 친구'의 임순례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13일 개봉. 15세 관람가.
/이종도기자 ecri@hk.co.kr
"우아하지만 역겨운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1997년 운동권의 허무한 후일담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를 발표했던 김응수 감독은 두번째 영화 '욕망'을 이렇게 소개했다. 영화는 주인공 이름, 로사나 레오처럼 낯설다. 로사(수아)는 남편 규민(안내상)의 뒤를 쫓다 불륜 상대가 레오(이동규)라는 알게 된다. 로사는 레오에게 접근해 섹스를 하고, 규민으로부터 버림받아 상심한 레오는 로사에게 빠져든다.
유럽 여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결심하고, 호스트 바에서 남자를 사는 데 익숙한 부잣집 여성의 욕망은 매우 작위적으로 표현된다, 여자는 남편을 빼앗은 레오에게 굴욕감과 몸을 주는 것으로 빼앗긴 사랑에 대한 질투를 표현하고, 사랑을 뺏긴 남자는 그의 아내로부터 굴욕을 당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려 한다. 욕망은 엉켜있지만, 결코 뜨겁지 않다. 부유한 이들의 욕망의 모습은 생활과는 떨어져 있고, '인간적' 면모로 표현되지도 않는다. 부조리극을 연상시키는 영화의 전개 방식은 관객을 끊임없이 낯설게 하면서 사랑의 욕망을 관조하게 만든다. HD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한 영화는 색과 미장센에 남다른 감각을 보이는 감독의 연출 의도와 만나 매우 독특한 질감의 화면으로 태어났다. 명징한 색 대비, 풍성한 색감은 이 영화가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를 강조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기이한 사랑 이야기지만, 욕망을 육체가 아닌 심리의 작용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보여주는 섹스 장면에는 땀냄새가 나지 않는다. 충동적 소재지만, 성적 욕망을 부추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를 사랑의 촉매제로 활용하고 싶은 일반 관객이라면, 매우 지루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또 다시 '차가운 섹스 영화'다. 20일 개봉. 18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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