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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11> 끝없는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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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11> 끝없는 시련

입력
2004.0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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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채는 무서웠다. 빚은 줄기는커녕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도 고리채의 실체를 잘 몰랐다. 그만큼 순진했다.빚쟁이 신세는 정말 비참했다. 1982년 말 8,000평 규모의 경기 반월 농장에는 10만 그루의 알로에 재고가 쌓였다. 경쟁자들의 덤핑 공세로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 없었다. 피땀으로 일궈낸 농장인데 한숨만 깊어졌다. 귀한 달러를 주고 수입한 알로에도 방치됐다. 당연히 자금난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채권자들은 집요했다. 나는 당시 남한산성에 자주 올랐다. 세상 시름을 잊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건강을 지키겠다는 뜻도 있었다. 모든 걸 다 잃어도 건강만 유지한다면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악귀 같은 채권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평소 내게 적지 않은 신세를 졌던 한 채권자는 대뜸 "회장님은 기독교인이지요"라고 비아냥대듯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기독교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데 왜 돈을 갚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했다. 큰 돈도 아니었다. 단돈 200만원 때문에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빚 진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나는 머리 속에 참을 인(忍)자와 재기(再起)라는 단어를 되뇌며 모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반월 농장도 남의 손에 넘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알로에도 농장도 친구도 친지도 다 잃게 될 처지였다. 나를 배신한 대리점과 다른 알로에 사업자, 건강 식품업자 모두 참담한 몰락의 길을 밟았다. 그 와중에도 나만 무너뜨리면 알로에 시장을 독점할 수 있다며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이 적지 않았다.

그 무렵 한 줄기 빛은 있었다. 나는 알로에 생주(生柱), 생잎으로는 더 이상 승부를 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알로에 베라 생잎은 미국에서, 아보레센스 생주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그런데 통관과 국내 유통과정에서 반 이상은 잎이 마르는 등 상품 가치를 잃었다.

그래서 일단 일본에서 아보레센스 분말을 수입키로 작정했다. 장기 보관이 가능한 분말은 유통 손실 없이 100% 상품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에서 '불가(不可)' 판정을 내렸다. '알로에 베라겔' 수입 때는 전혀 규제를 하지 않던 보사부가 갑자기 알로에가 식품이냐 약품이냐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건강식품'에 대해 별다른 제재나 규제가 없었다. 그런데 보사부는 알로에 분말 수입은 식품 판정을 받아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보사부를 찾아가 끈질기게 설득했지만 결국 담당 국장 이름으로 불가란 공문을 받았다. 알로에 제품 범람, 특히 가짜와 함량 미달이 판을 쳐 알로에 이미지가 땅에 떨어진 사회적 분위기도 작용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졌다는 절망감이 뼈에 사무쳤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합격 판정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관공서에서 한번 불가 통고를 받은 사안을 뒤집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그 과정은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 무렵 나는 시인 장순하와 함께 산에 올랐다. 그는 우리 회사의 고문을 맡았다. 83년 초로 기억한다. 나는 장 선생에게 "진달래가 피는 봄이 되면 다시 일어나겠지요"라고 물었다.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 선생은 "진달래가 아니고 산수유 꽃이 필 때면 재기하실 겁니다"라고 답했다. 산수유는 우리나라 봄 꽃 중에서 제일 먼저 핀다. 장 선생은 진달래보다 열흘 정도 빨리 꽃망울을 터뜨리는 산수유를 빗대 내가 수렁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다고 격려한 셈이다.

그러나 그 해 봄 내겐 산수유도 진달래도 피지 않았다. 봄이 채 오기 전인 83년 2월 나는 알로에 농장을 친구 L에게 넘겼다. 내겐 1억6,000만원의 빚만 남았다. 적수공권(赤手空拳) 보다 더 열악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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