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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아무 편도 아닌 사람

입력
2004.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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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복잡·다원화하고 각종 이념이 기승을 부리는 시대에 아무 편도 안 들고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한 쪽에 가담해 스스로의 목소리를 보태거나 기르지 않는 한 아무도 그 개인을 알아 주거나 보호해 주지 않는다. 단체활동에 익숙하지 않거나 조직의 힘으로 자신을 키우는 데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은 점차 설 땅이 없어지는 세상이다.지금의 한국사회에는 편 가르기 구조가 고착돼 가고 있다. 무슨 일이든 내 편 네 편으로 갈라져 다툰다.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다. 참여정부 들어 정착된 코드라는 말이 이런 사회현상을 분석해내는 좋은 기호라 할 것이다. 일정한 사안에 대해 나름대로 소신과 철학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무엇이든 마음 놓고 발언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실제로는 그게 아니다. 순수성과 진정성을 결코 문자 그대로 해독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이데올로기논쟁에 휩싸이는 일이 잦다. 이런 상황의 원형(原型)을 조선시대의 당쟁에서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당쟁의 폐해와 유풍이 아직도 작용하는 것이라면 정말 참담한 일이 아닌가.

30여년 간 서울대 사회과학대의 입학자들을 분석한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원의 조사는 엉뚱하게 평준화논쟁으로 비화됐고, 평준화 해제냐 보완이냐의 교육이념쟁투에 휘말렸다. 이념논쟁은 좋으나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문제와 비슷하게 너무도 빤히 보이는 편가르기가 벌어지는 게 문제다. 김수환 추기경의 시국발언에 대한 비판도 편 가르기식 싸움으로 비화됐다. 김 추기경의 발언동기를 세세히 알기는 어렵지만, 이 정부에 대한 섭섭함과 불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최근의 논쟁을 보며 가톨릭 관계자는 "추기경의 말씀 중 경청할 부분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논쟁에 부치지 말고"라고 말했다 한다. 정말 그럴 수는 없는 것일까.

모든 문제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발언의 내용과 경위를 파악해 순수하게 받아들이려 하기보다 저의와 행간을 읽으려는 의심의 눈길이 도처에 깔려 있다. 그 이유는 편을 갈라서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음모로 해석되고 편집되며, 논란거리가 생기면 반드시 상대방을 짓밟고 거꾸러뜨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양상으로 다툼이 진행된다.

4·15총선을 앞두고 낙선·당선운동 대상자를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시민단체의 경우 이 쪽의 당선운동 대상자가 저 쪽의 낙천·낙선운동 대상자인 경우까지 있다. 사유는 해당 단체의 결성취지와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당선운동대상자는 결국 자기 자신들이나 마찬가지이며 낙선운동대상은 그들의 적이라고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의 다툼은 이미 골이 깊을 대로 깊어졌고, 시의에 따라 유연한 변화와 대처가 필요한 외교·안보 문제에서마저 동맹파니 자주파니 하는 이분법적 편 가르기가 생겼다. 미국과의 동맹이나 북한과의 협력 모두 필요한 일이며 이를 어떻게 주도적으로 행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그렇다.

언론이 이 같은 상황을 부추기는 측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언론은 없는 일을 지어내지는 못 한다. 현상을 부각시켜 쟁점화할 뿐이다. 상황을 자의적으로 만들어내고 왜곡하는 매체가 있다면 지탄 받아 마땅하며 도태돼야 한다.

편을 갈라서 사는 것이 편안한 사람들이 볼 때 아무 편도 아닌 사람은 회색인이자 경계인이거나 기회주의자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자이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존중할 줄 아는 인문주의자다. 필요한 것은 관용의 정신이며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아는 자세다. 그런 자세가 없으면 한국사회는 더 성숙해질 수 없다. 아무 편도 아닌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임 철 순 수석논설위원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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