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 그가 돌아왔다.그는 우리에게 중국어 발음인 리샤오룽(李小龍)이나 영어식 이름 브루스 리보다 이소룡으로 친숙하다. 그렇게 불러야 용(龍)이 지닌 카리스마가 제대로 살아난다. 그래서 이번 만큼은 언론에서 따르는 외래어 표기 원칙을 떠나 이소룡으로 부르기로 한다.
1970년대 불었던 이소룡 열풍이 요즘 들어 새롭게 일고 있다. 미국에서 이소룡 열풍을 다시 일으킨 ‘킬빌’, 30, 40대 영화 팬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고 있는 ‘말죽거리 잔혹사’. 두 영화는 이소룡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Hommageㆍ경배)에서 출발했다. 18일에는 ‘당산대형’ ‘맹룡과강’ ‘정무문’ ‘사망유희’ 등 그의 대표작 4편을 묶은 ‘이소룡 박스세트’ DVD가 선보인다. 7월에는 미국과 국내에서 동시에 그의 최대 성공작 ‘용쟁호투 특별판(SE)’ DVD가 새롭게 출시된다.
영상 뿐만 아니다. 인형, 플래시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그를 닮기 위해 사람들은 도장을 찾아 무술을 배우고 있다. 가히 전성기 못지않다.
■ 이소룡을 꿈꾸는 사람들
서울 강남역 근처 무술도장인 세계절권도연맹 한국총본관에는 날마다 이소룡을 꿈꾸며 절권도를 연마하는 100여명의 수련생으로 붐빈다. 수련생은 앳된 여대생부터 머리가 벗겨진 50대까지 다양하다. 이중에는 장혁, 김수로, 박수일 등 낯익은 배우들도 보인다.
“워낙 이소룡과 절권도에 관심이 많았는데 김수로 형을 통해 도장을 알게 됐어요. 한 달 정도 배웠는데 액션 연기 뿐만 아니라 정신수양에 도움이 됩니다.”(장혁)
“얼마 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원빈에게 맞는 장면을 찍다가 서로 동작이 어긋나면서 제가 다칠 뻔 했어요. 다행히 절권도를 배운 탓에 위기를 모면했지요.”(박수일)
국내에서 이소룡 팬사이트로는 가장 큰 싸이월드(www.cyworld.com)의 ‘이소룡 대백과사전’ 클럽. 2001년 문을 연 이곳은 최근 회원이 부쩍 늘어 2,000여명을 넘어섰다. 이곳에는 쉽게 구하기 힘든 이소룡 사진, 동영상, 문헌 등 희귀 자료들이 가득해 이소룡 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클럽장인 박광수(32)씨는 “매일 20명 이상씩 가입신청을 한다”며 “회원은 이소룡을 잘 모르는 10대부터 이소룡 세대인 30, 40대까지 다양하다”고 말했다.
10대에게 이소룡을 알린 최대 공신은 청설모(본명 박상분)가 만든 플래시 애니메이션 ‘부활 이소룡’이다. 현재 9부까지 제작된 이 작품은 독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무단 침입한 일본의 악당 ‘니기미 씨바사키’를 혼내주는 이소룡의 활약을 다룬 내용으로, 500만명이 넘는 네티즌이 전송 받았다.
■ 이유가 뭐길래
이소룡 세대인 ‘말죽거리 잔혹사’의 유하 감독은 요즘의 이소룡 열풍을 “향수와 신기함의 이중 코드때문”으로 풀이했다. “70년대 이소룡은 억압적인 군사정권 아래 억눌려 있던 사람들에게 일탈을 위한 출구를 밝히는 불빛 같은 존재였죠. 요즘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구요. 따라서 기성세대에게는 과거의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신세대에게는 새로움을 자극하는 요소로 봅니다.”
그럼 왜 하필 이소룡일까. 유 감독은 “이소룡은 엔터테이너이기 이전에 사상가였다”며 “영화에서 보여준 빛나는 카리스마와 그의 무술에 녹아든 노장사상이 사람들에게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도록 만들며, 바로 이 점이 다른 스타들과 질적 차이를 빚어낸다”고 보고 있다. 이소룡은 결국 영웅부재시대의 긍정적인 대안이 되고 있는 얘기다.
■ 이소룡은 누구 - 70년대 무술영화 열풍… 32세 요절
그는 1940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극 배우 이해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7세때 아버지를 따라 홍콩으로 건너간 그는 13세 때 자기보다 약해보이던 소년과 싸움을 벌였다가 흠씬 두들겨 맞고나서 태극권, 영춘권 등의 무술을 배웠다.
그는 18세때 미국 시애틀로 옮겨 워싱턴 주립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밤에는 여러가지 쿵후의 강점 만을 모아 새로운 무술을 개발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절권도(截拳道).
LA의 도장에서 제임스 코번, 스티브 맥퀸, 카림 압둘 자바 등 유명인들에게 무술을 가르쳤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TV시리즈인 '그린호넷'에 출연한다. 이 작품을 눈여겨 본 홍콩 영화제작자 레이몬드 초는 그를 태국으로 불러 71년 '당산대형'을 촬영했다.
이 작품에서 기존 무술과 다른 절권도를 선보여 인기를 끈 그는 잇따라 '맹룡과강' '정무문' '용쟁호투' 등 후속작을 발표하며 '괴조음'으로 불리는 고음의 기합소리와 귀신 같은 쌍절곤 솜씨로 일약 세계의 스타가 됐다. 그러나 73년 유작인 '사망유희' 촬영도중 쓰러진 그는 2개월 후 뇌종양으로 서른두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최연진기자 wolfpack@hk.co.kr
●"절권도는 폭력막는 무술이죠"/한국총본관 이끄는 김종학씨
국내에서 유일하게 이소룡의 정통 절권도를 전수받은 세계절권도연맹 한국총본관 김종학 관장이 수련생에게 무술을 지도하고 있다.
“절권도(截拳道)는 상대의 주먹을 막는 무술, 즉 폭력을 막는 무술입니다. 지극히 방어적이면서 공격적인 무술이지요.”
이소룡이 만든 절권도의 실체를 묻는 질문에 세계절권도연맹 한국총본관을 이끄는 김종학(35) 총관장은 알쏭달쏭한 설명을 했다. 그는 “몸으로 느끼게 해주겠다”며 주먹을 뻗어 보라고 했다. 주먹을 내지른 순간 그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뻗은 주먹을 후려쳤다. “나를 공격하는 상대의 무기를 부숴 버립니다. 방어가 곧 공격이지요.”
이소룡의 정통 절권도를 가르치는 무술인인 김관장은 중학교때부터 쿵푸, 우슈 등을 연마해 우슈 체육관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이소룡 직계제자인 진륭의 명함을 한 장 건네 받고 1993년 무작정 대만으로 찾아갔다. 그는 흠모하던 이소룡의 무술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도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3년 동안 진륭에게 절권도를 배웠다.
그는 사범을 할 수 있는 교련 자리에 오른 뒤 97년 귀국, 청주에 한국총본관을 열었다. 날로 수강생이 늘어나자 99년 서울 역삼동으로 본관을 이전, 매일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소룡의 후예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절권도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 반갑습니다. 나이 어린 학생들도 많이 찾는데 초중생은 받지를 않습니다. 무술에 담긴 정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서울 신촌에 도장을 추가로 개설해 세미나를 여는 등 절권도 확대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최연진기자
● "내가 만드는 인형 이소룡 꼭 닮았대요"/액션피겨 제작 김형언씨
“어, 이소룡이다!”
움직이는 인형(액션피겨)을 만드는 피겨 아티스트인 김형언(38)씨 책상에는 갖가지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이소룡이 즐비하다. 모두 그가 직접 만든 액션피겨다.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이소룡의 광팬입니다. 어느날 외국에서 만든 이소룡 액션피겨를 샀는데 화가 날 정도로 얼굴이 닮지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죠.” 홍익대에서 금속공예를 전공한 미술학도인 만큼 무른 플라스틱인 스컬피와 에폭시 퍼티 등의 재료를 이용해 손으로 빚고 깎고 다듬고 덧붙여 이소룡 인형을 만든다.
이소룡 영화를 수백 번 이상 보고 각종 사진 자료를 분석해 한 달 이상 걸려 만든 인형의 얼굴은 사진으로 찍어 놓으면 실물로 착각할 만큼 이소룡과 닮았다. 그의 작품을 외국업체가 복제한 것이 인터넷 경매사이트인 이베이에서 1,000달러가 넘는 가격에 팔리는 지경이다.
지금까지 ‘맹룡과강’ ‘용쟁호투’에 등장했던 이소룡의 모습을 인형으로 만들었고, 현재 ‘사망유희’의 한 장면을 재현한 이소룡 인형을 제작중이다.
그의 원래 직업은 작곡가. 1996년에는 노래까지 부른 독집 음반을 냈으며 2000년에는 임채욱과 올웨이즈라는 듀엣을 만들어 활동했다. 자작곡 가운데 ‘그녀에게’ ‘채울 수 없는 사랑’ 등이 광고 및 드라마 삽입곡으로 쓰였다.
“요즘은 인형 제작 때문에 도통 곡을 못쓰고 있어요. 사망유희 작업을 마치면 곡을 써야죠.” 그의 꿈은 직접 만든 이소룡 인형을 미망인 린다씨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최연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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