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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여자탁구, 中 이질러버에 무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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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포츠 50년]여자탁구, 中 이질러버에 무너지다

입력
2004.0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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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2월 10일제33회 세계탁구선수권 여자단체 준우승

중국의 소위 '이질 러버'가 등장해 세계 탁구계에 쇼크를 준 대회였다. 2년 전 32회 사라예보대회에서 일본을 3-1로 꺾고 사상 처음 코르비용컵을 품에 안은 한국은 이번에도 파죽지세로 준결승에 올라 일본을 3-0으로 일축, 2연패를 눈앞에 두었다. 4단1복식의 결승전 상대는 중국.

첫 단식서는 이에리사가 세계1위인 장리(張立)에게 0-2로 패배. 중국의 또 한 명의 단식 주전은 신인 거신아이(葛新愛). 복식에만 나왔던 그가 단식에 기용된 게 의아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노련한 정현숙이 쉽게 요리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경기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상대의 볼은 연습 때의 가벼운 커트와는 전혀 다른 기묘한 변화구였다. 가까스로 첫 세트는 21-19로 잠재웠으나 2세트를 내주고 3세트는 9-16으로 몰렸다. 정현숙은 게임을 포기할 셈치고 맹공을 가해 20-18로 역전시켰지만 다시 20-22로 뒤집히고 말았다. 단식을 내리 져 0-2. 벼랑 끝에서 복식(정현숙 이에리사)을 따내고 다음 단식서 정현숙이 몇 달 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완패한 바 있는 장리에 필사적으로 맞서 2-0으로 승리, 2-2 타이를 이루었다.

기적 같은 역전극이 일어날 분위기. 마지막 단식의 이에리사는 우승을 자신하는 듯 흥분된 표정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이에리사도 거신아이의 볼을 받아 넘기기에 급급했다.

박성인 감독(현 삼성스포츠단 부사장)은 먼저 싸운 정현숙을 불러 대책을 물었으나 "처음 당해 본 볼이어서 도저히 말로 설명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 할 뿐. 이에리사는 좀처럼 루프 드라이브를 걸 기회를 잡지 못한 채 두 세트서 14,10점 밖에 따내지 못했다. 상대는 중국이 한국 타도를 위해 다듬어 온 비밀 병기였고 그의 라켓 양면은 성질이 다른 특수 고무가 장착되어 있었다. 앞면은 핌플(돌기)러버, 뒷면은 4㎜ 정도의 스폰지 러버가 붙어 백핸드는 무서운 스피드를, 포핸드는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이상 야릇한 변화를 일으켰다.

한국은 중국의 이질 러버에 7∼8년을 더 고생해야 했다.

1997년 2월 11일

이규혁 나가노 세계선수권 우승

신사중 2년, 14세에 한국 스피드스케이트 사상 최연소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규혁. 1962∼71년 스피드스케이팅 국가대표로 올림픽까지 출전했던 이익환과 당시 피겨스케이팅의 대표팀 코치인 이인숙의 2세란 점 때문에 더욱 기대를 모은 빙판의 신동은 마침내 나가노 세계선수권 500m에서 우승, 세계무대의 강자로 등장했다. 전년도 세계주니어선수권 남자 500m를 주니어 세계신기록으로 제패했지만 성인무대 우승은 처음.

그는 이 해 11월 6일 국내링크 사정상 캐나다 캘거리에서 연 전국종목별선수권대회에서 1분11초27로 호리 마나부(일본)의 1,000m 세계기록(1분11초94)을 깨더니, 24일 월드컵 경기서 1분10초42로 하루 전 호리가 세운 1분10초86의 기록도 다시 무너뜨렸다.

다음해 3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1,500m도 1분45초20의 세계신을 수립. 500m 1,000m가 주종목이기에 전혀 기대치 못했던 결과였다.

연속 신기록 뒤에는 '클랩 스케이트'라는 신무기가 있었다.

'클랩 스케이트'는 일반 스케이트와 달리 뒷날이 붙었다 떨어졌다 하도록 고안돼 스케이팅때 뒤꿈치가 들려도 날은 빙판과 붙어 있어 마찰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게 장점.

그 해 2월 무주 전주 동계유니버시아드 때 네덜란드 선수들이 처음 착용해 좋은 성적을 냈으나 빠른 스타트를 요하는 단거리 선수들에게는 불리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주저하다가 10월에 갈아 신었는데 바로 첫 대회부터 신기록이 작성된 것.

1974년 2월 12일

김택수 대한체육회장 재선

역대 대한체육회장 중 22대 민관식씨(7년 7개월) 다음으로 긴 7년 4개월(71년 11월∼79년 2월)을 재임한 김택수(사진) 24대회장이 재선됐다.

71년 공화당 국회의원을 거쳐 아마복싱연맹회장으로서 대한체육회장에 선임된 그는 77년 장기영 전 위원의 타계로 한국인으로는 4번째 IOC위원에 피선됐으나 83년 7월 57세에 숙환인 간암으로 별세했다.

한국 스포츠의 골격을 세운 공로자로 평가받는다. 대표선수 훈련에 있어서 '선체력 후기술'을 강조하며 직접 선수강화위원장을 맡는 등 경기력 향상에 앞장섰으며 그 결과로 임기 중 건국 후 첫 올림픽 금메달(76년 양정모) 획득을 이루었다.

또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들에 대한 연금제도를 신설했으며 사재를 들여 선수촌 시설을 확장하고, 지도자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전임코치제를 마련했다. 73년 모스크바 유니버시아드에는 선수를 인솔하고 단장으로 참가, 공산권의 벽을 무너뜨리는 스포츠외교를 펼쳤고 서울올림픽 유치때는 IOC위원으로서 결정적인 막후역할을 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70년대 탁구스타 정현숙

대한올림픽위원회(KOC) 상임위원, 대한탁구협회 홍보이사, 한국여성스포츠회 전무이사, 단양군청 여자탁구팀 감독.

여자 국가대표 출신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70년대 탁구스타 정현숙(52)씨는 아직도 중년 이상 팬들의 기억에는 단발에 머리띠를 하고 끊임 없이 커트로 볼을 받아 넘기는 앳된 세이크 핸더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후배 이에리사(전 현대백화점 감독)와 73년 사라예보 세계대회 우승, 75년 캘커타와 77년 버밍검 세계대회 준우승의 주역이었던 정현숙은 77년 은퇴와 함께 결혼해 가정으로 들어갔다가 85년 방송의 스포츠 리포터로 팬들 앞에 복귀, 20년간 방송인과 생활체육지도자, 여성스포츠계와 탁구협회의 임원으로서 바쁘게 뛰어 왔다.

특히 차분한 목소리와 말솜씨로 방송에서 인기를 끌어 재작년 단양군청의 창단감독을 맡기 전까지도 교통방송의 주말프로를 진행했다.

90년 11월 베이징 아시안게임때 중국의 활발한 생활체육을 보고 충격받아 곧바로 잠실종합운동장내에 개설한 정현숙 탁구교실은 이제 15년째.

"주부와 어린이들에게 생활의 활력을 주고, 탁구인구와 사회체육의 저변을 확대해보자는 뜻에서 시작했는데 초창기에는 회원이 300여명씩 되었고 지금은 100명정도예요. 요즘은 조기 퇴직바람 때문에 중년 남성도 많고요."

그 동안 거쳐간 인원은 족히 1만명은 될 것이라고 한다.

탁구의 인기가 너무 저하됐다는 지적에는 "탁구인으로서, 협회 홍보이사로서 큰 책임을 느낀다"며 "무엇보다 국제대회에서 성적이 나야 인기를 회복할 수 있는데 지금 대표들이 노쇠해 안타깝다. 요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힘든 운동은 안 시키려 해 선수가 감소하는 것도 큰 문제이다. 당장은 힘들지만 초·중생 선수들중에 큰 재목감이 보여 기대를 걸고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는 스포츠가 학교 중심이라 운동부가 없는 학교의 학생들은 대회도 참가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생활체육이 밑바탕이 되고 유럽에서와 같이 클럽에서도 대표선수가 나와야 합니다. 일반인도 선수 못 지 않은 경기력을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이들이 참가하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생활체육대회를 여는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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