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檢'이라고 씌여진 감투를 쓴 사람이 칼을 휘두른다. 청와대 인사 등 이른바 권력 실세 앞에서 또 다른 감투는 '예스 써'를 외친다. 구속되는 정치인, 줄행랑 치는 정치인, 밤잠을 설치는 정치인도 등장한다. 과거 시사만화는 권력과 검찰의 관계를 그렇게 그렸다.요즘은 어떨까. 180도 달라졌다는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권력자 앞에서 '예스 써'를 외치는 감투는 없다. 오히려 '노' 하고 맞서다 급기야 대통령 측근들까지 구속했다. 비리 정치인들은 걸리는 대로 감옥으로 보냈다. 그야말로 '檢'이 '劍'을 맘껏 휘두르는 '檢의 시대'다.
상황 반전은 SK 분식회계 사건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9일 시작됐다. 노무현 대통령과 평검사간 대화가 계기였다. 대통령이 모욕과 분노를 자제하는 표정이 역력한 가운데 살얼음판 걷듯 진행된 토론이 끝나자 시중엔 '검사스럽다'는 말이 돌 만큼 검사들에 대한 냉소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검사들은 엄청난 성과를 올렸다. 검찰 중립은 물론 검사들이 상사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실제 그 약속은 지켜졌다. 지난해 10월 SK해운 비자금 사건 수사에서 촉발된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그 결과물이다.
검사에 대한 냉소는 사라졌다. 오히려 격려와 지지의 박수 소리가 우렁차다. 검찰이 부담스러워 할 정도다. 검찰의 변화는 사회 각 분야에 새 바람을 불어넣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정치권은 정치개혁을 위한 논의에 착수했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돈 선거'에 대한 국민적 경계심은 어느 때보다 강해졌다. 재계도 더 이상의 불법 정치자금은 주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살아있는 권력'에도 칼을 들이댄 검찰의 서슬 푸른 기세 앞에 화들짝 놀란 탓이었다. 그래도 새로운 개혁과 변화의 물꼬를 튼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나 수사가 4개월 이상 진행되자 '수사 피로감'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약속은 슬그머니 뒷전으로 밀렸다. 총선이 목전에 있는데 수사가 끝날 기미조차 없자 정치권은 초조했던 것같다.
한화갑 의원의 표적 수사 주장이 제기되자 몇 달 동안 숨죽이며 '옥의 티'라도 찾으려 했던 듯 정치권의 포문이 열렸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불공평 수사, 기획 수사, 표적 수사 주장으로 검찰을 거세게 몰아부쳤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지역주의에 기대려는 행태도 다시 꿈틀댔다. 급기야 '검찰 청문회'를 열기로 했다.
정치권 주장대로 검찰 수사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흠결도 있을 것이다. 또 수사를 당하는 입장에서 불만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할 것이다. 그렇다 해서 부패와 비리 청산이라는 큰 물줄기는 외면한 채 수사 흠집내기에만 열중해서는 곤란하다. 정치권은 수사를 받고 있는 피조사자 신분이다. 시민단체에서 전원 물갈이 주장까지 나올 정도다. 더구나 정치권은 검찰 수사의 허점을 찾기 위해 특별검사까지 동원한 마당이다.
검찰에 변화를 일으키고, 그 변화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검찰 수사에 대한, 부패와 비리 청산에 대한 국민적 감시와 지지다. '차 떼기'로 검은 돈을 실어나르고, 검은 돈으로 대선 후보 경선전을 치른 정당이 검찰을 청문회 증인석에 세우는 것은 부패와 비리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청문회에 앉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개혁과 변화의 시계바늘은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지난해 3월9일 이전으로 시계바늘을 되돌리려 할수록 국민적 비난은 더 거세질 것임을 정치권은 알아야 할 것이다.
황 상 진 사회1부 차장대우 apr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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