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평북 구성의 봄 풍경이다. 소녀를 다룬 김소월의 산문 '춘조(春朝)'의 일부분이다. <등 뒤에 인적이 있는 듯하기에 돌아섰다. 흰 적삼 치마를 입은 계집 아이가 조그마한 둥지를 들고, 묏발 아래서 허리를 굽혔다 일어섰다 하는 것이 보인다. 열 한두 살 되어 마른 풀포기를 뒤적거리다가 기운 없이 언덕으로 올라온다. 커다랗고 둥그란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머리를 숙이고 걸어가며 작고 가늘은, 입안에 넣은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가끔가끔 목메인 소리 속에 떨리며 끊어진다…> ■ <엄마야 오늘도 해가 떴고나 죽으신 엄마는 그리도 곱고 살았는 왜 니악한지 엄마야 나 이렇고나 이렇게 너 생각한다…. 나는 윗마을에 사는 년순의 딸인 줄을 알았다. 얼마 전 그를 낳은 어머니는 죽고, 새어머니가 들어와서 어린 딸아기에게 몹쓸게 군다는 말을 어디선지 들은 듯하다. 그 아침 밥상에 놓을 나물을 캐어 오라고 이른 아침에 쫓아낸> 가장 민족적인 시인의 글을 통해 듣기 때문인지, 소녀의 노래가 애처롭기 그지없다. 이 정경을 전근대적 삽화라고 부르기엔, 우리 주변에 아직도 비정한 지대가 많다. 엄마야> 등>
■ 입춘 날 듣는 소식이 안쓰럽고 처절하다. 많은 훌륭한 계모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지만, 계모가 전처 소생의 8살짜리 딸을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들(6)은 중태다. 여인은 지난해도 남매를 때린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도 가족제도와 인간성의 조춘(早春)이기 때문인가. 그러나 비정한 사회만은 아니다. 극단적 대조지만, 사랑의 입양운동도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입양기관 수는 1995년 27개에서 2000년 26개, 2001년 24개로 약간 줄었다. 그러나 입양아동 수는 3,205명에서 4,046명, 4,206명으로 계속 늘고 있다. '수민이 엄마'인 연극배우 윤석화씨는 입양활성화를 위해 콘서트도 열었다.
■ 지금은 들을 기회가 적지만 '업둥이'라는 말이 있다. 실험성 강한 작업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문화운동에 전념하는 화가가 있다. 그는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었다. 어느날 새벽 대문 밖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강보에 싸여 있는 업둥이였다. 아이의 친부모가 훗날 찾아올세라, 부부는 서둘러 이사를 했다. 초등학생 무렵 아버지를 따라 나온 그 딸도 인사동에서 만난 적이 있다. 애틋한 부녀 모습을 보는 가슴 속에서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작업이나 이념보다는 그 사연 때문에, 그 화가를 좋아하고 있다.
/박래부 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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