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창간 50주년을 맞는 한국일보가 매월 독자 사은행사로 벌이는 '한국일보 문화기행' 2월의 테마는 '겨울 보내기와 봄 맞이'이다.계절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법. 이제 계곡에 쌓인 눈은 잔설이 되고 바람의 날카로움도 한결 무뎌졌다. 여행의 의미에서 볼 때에는 애매한 시기이다. 그러나 눈을 부릅뜨면 틈새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바로 '계절의 이동'이다. 겨울은 어떤 모습으로 가고 봄은 어떻게 얼굴을 내미는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봄이 더욱 화려하게 보일 것이다.
영상기행은 8일(일) 드라마 '왕건'의 촬영지인 경북 문경새재로 떠난다. 가벼운 트레킹과 국내에서 가장 큰 드라마 촬영 세트가 기다린다. 자연기행은 14일(토) 강원도 대관령 옛길을 더듬는다. 큰 도로가 나기 전에 백두대간 동쪽에 살았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땀을 흘렸던 산길을 걷는다. 사찰기행은 21일(토) 전북 변산반도의 내소사로 잡았다. 절 뿐 아니라 논란이 끊이지않는 새만금간척사업 현장과 아름다운 변산의 일몰이 기다린다.
/권오현기자 koh@hk.co.kr
영상기행
문경새재 (경북 문경시)
드라마 '왕건' 촬영지
8일(일) 오전 7시 출발
준비물:등산화(운동화) 장갑 털모자
문경새재는 서울과 영남을 잇는 길이었다. 조령산과 주흘산이라는 백두대간의 가파른 두 봉우리 사이로 난 길이다.'영남'이라는 말은 바로 '새재(조령·鳥嶺)의 남쪽 지방'이란 의미이다. 사람은 물론 모든 물산(物産)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과 영남을 오갔다.
발길이 잦은 곳은 사연도 많은 법. 이 언덕길에는 사람들이 엮어낸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새재 나들이는 길손들의 이야기와 손때를 더듬는 여행이다. 더불어 그들이 숨쉬던 과거에 젖어보는 타임머신 여행이기도 하다.
새재는 조선 태종이 개척한 길이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낙동강과 한강의 물줄기가 흐른다. 고개를 넘은 사람과 산물은 바로 배에 실려 굽이굽이 물을 타고 서울로, 영남 각지로 운반됐다. 이 중요한 길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세 곳에 문을 달았다. 조선 선조 27년(1594년)에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이 세워졌고 숙종 34년(1708년)에 주흘관(제1관문)과 조령관(제3관문)이 들어섰다. 수 차례 불에 타거나 비바람에 무너진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사적 제147호로 지정했다.
백두대간의 다른 언덕길이 대부분 아스팔트로 뒤덮여 있는 반면, 새재 길은 옛모습 그대로이다. 일제가 서울로 쉽게 들어가기 위해 1926년 이화령이라는 신작로를 옆에 만들며 새재는 옛길이 됐다. 덕분에 살아 남았다. 최근 이화령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생기면서 이젠 이화령이 옛길이 됐고, 새재는 '원조 옛길'로 물러앉았다. 옛길 입구부터 충북 충주시와의 경계에 서있는 제3관문까지 왕복 약 14㎞. 고갯마루에서 충주까지 내려가는 길은 거의 폐쇄돼 이제 찾기 힘들다.
새재에 오르는 산행은 길이 너무 좋아 조금 긴 산보로 생각하면 된다. 흙에 갈증이 난 도시인이라면 천천히 거닐며 그 흙기운에 취해봄 직하다. 매표소에서 500m 가면 성곽과 문이 보인다. 제1관문인 주흘관이다. 세 개의 관문 중 제 모습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 낯이 익다. KBS드라마 '태조 왕건'에 수 차례 '출연'한 까닭이다. 돌림병 때문에 왕건이 견훤에게 무릎을 꿇었던 조물성 전투. 그 배경이 된 관문이다.
주흘관 뒤쪽 계곡을 지나면 커다란 마을과 만난다. 현대식 마을이 아니라 고려시대 마을이다. 제법 규모가 큰 성이 곳곳에 서있고, 여염집의 지붕은 풀로 엮었다. 사극 전용 세트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왕건' 촬영장이다. 연인원 3,000여 명이 동원돼 2만여평의 부지에 세 개의 왕궁과 귀족촌, 민가를 세웠다. 7명의 학자가 고증을 했다. 가족 나들이는 물론 단체 답사지로도 인기가 높다.
왕건촬영장을 지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본격적인 산길이다. 산길이지만 넓고 경사가 없다.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가 트레킹 코스. 적당히 땀이 난다. 일정이 허락되면 돌아오는 길에 물 좋은 수안보에서 온천욕을 할 예정.
자연기행
대관령 옛길 눈꽃 트레킹 (강원 강릉시) 14일(토) 오전 7시 30분 출발 준비물: 등산화(방수) 아이젠 스페치 털모자 장갑 윈드재킷 여벌 옷과 양말
대관령도 새재와 마찬가지의 곡절과 운명을 겪은 고개이다. 영동과 서울을 잇던 이 고개를 기준으로 동쪽은 영동, 서쪽은 영서로 나뉜다. 새재처럼 길이 세 곳에 있다. 최근에 뚫린 직선 고속도로, 지금은 456번 지방도로가 된 옛 영동고속도로, 그리고 원조 옛길이다.
이중 원조 옛길은 수백, 아니 수천년 동안 우리 조상이 넘어다니던 길이다. 후삼국의 궁예가 명주성(강릉)을 자기 영토로 만들 때 이 길로 군사를 몰았고, 아들 이율곡의 손을 잡고 고향 강릉을 떠나던 신사임당도 이 길을 넘었다. 지금은 약 5㎞ 구간만 남아 강릉 시민이 사랑하는 등산로이자 인기있는 겨울 트레킹 코스가 됐다.
옛 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에서 강릉 쪽으로 약 500m 내려가면 '대관령 옛길, 반정(半程)'이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다. 옛길로 들어가는 곳이다. 반정이란 횡계와 강릉 파발역의 중간지점이란 의미이다. 비석에서 어흘리 대관령박물관까지가 메인 트레킹 코스. 내려가는데 1시간 30분, 오르는데 2시간이 소요된다. 편도는 물론 왕복 트레킹도 즐길 수 있다. 이번 여행은 참가자의 연령이 다양한 점을 감안, 내려가는 코스를 택할 계획이다.
길은 3, 4명이 이야기하며 걸을 수 있을 정도의 폭이다. 꼭대기 부분을 제외하고는 가파른 곳이 거의 없다. 원래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길이었는데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란 사람이 넓혔다. 중간 지점에 옛 사람들이 땀을 식히고 목을 축였던 주막터가 있다. 이곳부터 어흘리까지는 냇물이 함께 한다. 얼음이 얼어있지만 귀를 기울이면 봄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올 겨울 이 지역에 유난히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대관령 부근은 2월에 눈이 많다. 눈이 내리면 두 가지 재미가 보태진다. 눈꽃과 엉덩이 썰매이다. 아름다움과 즐거움, 여행의 두 묘미를 쉽게 이룰 수 있다.
대관령은 진부령과 함께 황태의 고장이다. 횡계 인근에 황태 덕장이 많다. 먹는 맛도 좋지만 보는 맛도 만만치 않다. 너른 벌판에 널려 있는 황태 덕장은 겨울의 진풍경이기도 하다.
사찰기행
변산 내소사 (전북 부안군) 21일(토) 오전 7시 출발
예로부터 '춘변산 추내장'이라 했다. 봄에는 변산이, 가을에는 내장산이 가장 아름답다는 이야기이다. '춘변산'의 핵심은 뭐니뭐니 해도 1,400년 가까운 세월의 무게를 이고 있는 고찰 내소사(來蘇寺)이다. 내소사는 633년(백제 무왕 34년) 혜구 두타(두타란 걸식으로 산야를 다니며 수행하는 스님)에 의해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또 원래 소래사와 소소래사가 있었으나 소래사는 불에 타 없어지고 소소래사가 남아 현재의 내소사가 됐다는 것.
독특한 절 이름의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7세기에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이 절을 찾아와 시주했기 때문에 '그가 왔었다(來蘇)'는 의미의 이름이 생겼다고 하나 이를 확인할 자료는 없다.
내소사의 아름다움은 나무에서 나온다. 나무의 모습, 나무의 크기, 나무의 색, 나무의 꽃이 찾는 이들에게 진한 추억을 만들어 준다. 일주문을 들어서서 천왕문까지 이르는 300m의 길은 나무의 모습과 크기가 압도적인 곳. 길이라기보다 하늘을 찌르는 전나무 터널이다. 시원하게 뻗어 올라간 나무의 끝과 뿜어져 나오는 강한 향기. 속세의 홍진을 씻어내기에 충분하다. 전나무 터널이 끝날 즈음 넓은 광장에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다. 조금 있으면 매화가, 4월이면 벚꽃이 하얀 꽃잎을 흩날린다.
천왕문을 지나면 오롯한 전각들이 눈에 들어온다. 야트막한 축대와 계단이 이어지다가 정면에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단청이 칠해져 있지 않는 진한 갈색의 나무기둥과 문살들에서 제 색깔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대웅보전은 쇠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를 깎아 끼워 맞추는 방법으로 지어졌다. 중건 당시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져 내려온다.
일을 맡은 도편수가 3년 동안 목침만하게 나무만 깎았다. 도대체 절을 지을 생각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하던 사미승이 나무토막 하나를 감추었다. 나무토막의 수를 몇차례나 세던 도편수는 주지스님을 찾아가 "절을 지을 재주가 못되니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사미승은 놀라 나무토막을 내놓았고 불사는 계속됐다. 그러나 도편수는 감추었던 나무토막을 부정하다고 여겨 끝내 쓰지 않았고 지금도 대웅보전 오른쪽 천장에 목침 크기만한 빈자리가 있다.
변산에는 내소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해안가 돌덩어리 채석강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리고 변산은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날씨가 좋으면 변산해수욕장에서 일몰을 보고, 그렇지 않으면 곰소 젓갈시장을 들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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