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공예의 시대가 돌아오고 있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드는 수공예 제품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명품을 만드는 이들을 찾아서 그들만의 명품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들어본다. /편집자주
서울 강남의 유명한 가구판매점 Y가구에는 수입가구 일색이다. 국산 가구로는 딱 한 사람 것을 판다. 1999년 완공된 제주의 롯데호텔에는 로비벽화가 채화칠기(彩畵漆器)이다. 제일모직은 옷값이 2,000만원대에 이르는 세계최고급 옷감 란스미어220을 옻칠 상자에 넣어서 판매한다. 이 세 가지 칠기를 만드는 이는 한 사람이다.
김환경(61·청목옻칠연구소 대표)씨. 그는 한국 최고의 채화칠기 장인일 뿐 아니라 명맥이 사라져버린 채화칠기를 오늘에 되살린 주인공이다.
채화칠기는 색깔이 들어간 옻칠 기물을 말한다. 신라 천마총에서 나온 천마도가 채화칠기이듯 우리나라에서 채화칠기는 그 역사가 오래 됐다. 하지만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자개를 쓰는 나전칠기가 칠기의 대종이 되어버렸다. 옻나무에서 나온 칠은 공기와 접하면 검어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검은 색과 대비되는, 반짝이는 자개를 쓴 것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김씨는 1979년 한국나전칠기보호 육성회에서 추진한 대만·일본 칠기계 시찰에 동참했다가 일본에 있는 엄청난 낙랑시대 채화칠기 유물들을 보고 "우리가 일본에 가르쳐준 채화칠기의 전통을 되찾자"는 마음에 채화칠기의 복원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낙랑의 채화칠기가 고구려에 이어지고 고구려의 예술이 백제를 거쳐 일본에 전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칠은 정제한 뒤 햇볕을 쪼이며 저어주면 맑아지는데 여기에 여러 가지 안료를 섞는 것이 색을 내는 비결이다. 물론 일본 칠 장인과 학자들이 이미 1930년대부터 여러 가지 색을 내는 비법을 개발해놓았으나 김씨는 여기에 보태어 돌가루나 이끼 흙 등 우리만의 재료를 섞어 자연색을 내는 방안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가 채화칠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은 1976년부터이다. 문헌과 자료를 찾아보며 색을 내보기 시작한 것이다. 80년대부터는 목칠교수인 백태원(81) 중앙대 명예교수를 사사했다. 86년에는 내당공방이라는 이름의 채화칠기 연구소를 낸 데 이어 첫 개인전을 가졌다. 그는 89년부터는 매년 두 차례씩 채화칠기 작품전을 열어 채화칠기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힘써왔다.
검은 바탕에 환하게 벙글어진 목련꽃 무리, 자개로 테두리를 만들고 분홍과 주황빛이 어른거리는 풍성한 모란꽃 다발, 황토흙 바탕에 늘어진 초록의 수세미와 주황색 꽃, 보랏빛이 먹음직스러운 포도문 등 그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다채롭기 그지 없다. 제일 만들기 힘든 것이 흰색. 옻 자체의 색이 있다 보니 연갈색으로 하면 5∼6년이 지나 색이 바래면서 흰색이 난다. 다른 색도 마찬가지. 옻 자체의 거무스름한 색이 세월의 때에 날라가면서 갈수록 색이 고와지는 것이 채화칠기의 특성이다.
김씨가 채화칠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가난 때문이었다. 전남 광주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생 시절, 민주당 계열에서 정치운동을 하던 아버지가 신익희(1892-1956)선생의 서거에 실망, 전 재산을 시주하면서 절로 들어가는 바람에 가난과 맞닥뜨리게 됐다.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경북 경산의 삼육중학교를 찾았고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대학도 무료로 배우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해가 1961년. 삼육대학에 들어갈 생각이었으나 배우면서 일할 자리가 없었다. 장충단 공원에서 노숙하기를 여러 날, 먹고 재워준다는 말에 들어간 것이 당시 번성하던 '농집'이었다. 삼선교 미아리 언저리에 퍼져 있는 농집은 나무로 가구를 짜서 옻칠로 마감하는 목가구집이었다. 다른 초심자처럼 그는 백골(나무로 만드는 가구틀) 짜는 일을 맡았다. 아침 6시면 일어나고 밤 12시까지 일하다가 지쳐 잠드는 생활을 계속하면서도 그는 자투리 시간이 나면 헌책방에서 산 미술교본으로 그림을 그리는 공부를 했다. 한시도 그림을 놓지 않았던 것이 오늘날 그를 채화칠기의 명인으로 만들었다.
1966년에는 공원이 50여명인 용산의 새살림 공예공방의 공장장으로 스카우트가 됐다. "제일 일찍 나오고 제일 늦게 가니까 입소문이 난 것이지요. 사람이 누구나 의지할 것도 없고 의탁할 곳도 없으면 목숨 걸지 않습니까."
그곳에서 백골 짜는 것에 일가견이 붙자 그는 75년 독립했다. 불광동에 있는 서금사에 백골을 짜주는 작업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칠기 공부에 들어갔다. "이걸 해서 먹고 살까" 싶은 번뇌가 엄습했지만 "만들 때 재미있어서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채화칠기를 만드는 과정은 우선 백골 작업에서 시작된다. 나무는 느티나무나 홍송을 많이 쓰는데 무늬가 좋은 느티나무는 원목 무늬를 살리기 위해 맑은 옻칠을 한다. 홍송은 생칠을 2∼3회 한 후 사포로 갈아 삼베를 바르고 호분으로 틈을 메우고 다시 옻칠을 한 후 사포질을 하고 그 위에 한지를 바르는 과정을 거친 후에야 검은 옻칠을 한다.
이렇게 된 기물에 채화작업을 하는 것이 다음 순서. 금분에 그림을 그려 붙이는 일본 채화칠기와 달리 그는 붓으로 일일이 그림을 그려 넣는다. 그는 붓으로 그리는 작업이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일본의 채화칠기가 꽉 짜여진 느낌이 나는 반면 그의 작품은 더 커다란 그림으로 열려있는 분위기를 갖는데 그는 이것이 한국과 일본 예술 정신의 차이라고도 표현한다.
채화 칠이 마르면 다시 사포질을 한 뒤 또 옻칠을 먹인다. 사포질과 옻칠의 과정을 다섯 차례나 반복해야 마침내 작품이 완성된다. 아무리 적은 작품도 한 달 이상은 걸린다. 큰 작품은 2, 3년 4, 5년도 걸린다.
칠기의 특성은 '습'(濕)으로 말린다는 데 있다. 보통 습도 80∼85%, 온도 20∼25도에서 말린다. 빨리 마를 리가 없다. 일단 이렇게 부착된 칠은 천년 이천년이 가도 변하지 않으며 갈수록 고운 색을 드러내게 된다. 원색에서 조금은 가라앉은 채화칠의 색을 그는 "깊고 따뜻한 아름다움"이라고 부른다.
그를 다른 장인들과 구분짓는 것은 창작정신이다. 그는 전통의 모사가 아니라 새로운 예술을 채화칠로 표현한다. 그는 그렇게 된 계기를 운보 김기창(1913-2001)에게서 찾는다. 운보가 그에게 "내 그림을 채화칠로 만들어보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92년부터 그는 운보의 그림을 채화칠로 재현했으나 "어른이 돌아가신 다음부터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99년 국제 이시가와 칠 디자인전 초대작가로 전시회를 갖는 등 일본에서 애호가 층이 두텁다. 작년 일본에 수출한 채화칠기제품만 1억원 어치에 이른다. 그는 화랑가에서 작품값이 매겨진 작가이면서 부산 신라대와 대전 배재대 숙명여대에서 채화칠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채화칠로 만드는 것은 가구나 기물부터 그림, 도자기까지 다양하다. 그림도 고구려 벽화부터 민화, 전통문양, 추상 등 다양하다. 그가 제일 공을 들이는 것은 문자 무늬이다. 옛 글자 가운데 수(壽)와 복(福)을 100가지 형태로 달리 쓴 글씨를 일일이 붓으로 그려넣는다. 최근에는 보리와 야생화 그림에 빠져있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작품이라 부를 것은 아직 없다. 뭐든지 만들고 나면 이것이 좀 부족한데 싶고 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만 든다"고 한다.
서화숙 편집위원 hssuh@hk.co.kr
카슈를 주의해야
옻칠은 색이 밝게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명한 색깔을 내기 위해 카슈를 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카슈와 옻칠은 달라도 크게 다르다"고 한국공예예술가협회 이칠룡 회장은 말한다. "일부 칠기인들이 카슈 제품을 옻칠로 속여서 선전하는 바람에 진짜 옻칠의 명성이 손상을 입었다."
카슈는 열대수목인 카슈나무에서 액을 채취한 것으로 일본이 옻칠 대용품으로 개발했다. 옻칠보다 색깔을 다양하게 낼 수 있지만 납성분과 포르말린이 들어가 지금은 일본에서도 잘 쓰지 않는다. 옻이 무독성 환경친화적인 제품인데 반해 카슈는 건강을 해치는 반환경 제품인 것이다.
김환경씨는 "옻칠은 납성분이 들어가면 색이 시커매지고 포르말린이 들어가면 색혼합이 안되고 굳어버리기 때문에 납이나 포르말린을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카슈와 옻칠을 쉽게 구분할 수 있을까. 김씨는 "장롱문을 열었을 때 눈이 맵고 냄새가 심하면 카슈"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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