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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6>동북공정의 논리 ② "고구려, 中군현서 건국·발전"은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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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中 고대史 전쟁]<6>동북공정의 논리 ② "고구려, 中군현서 건국·발전"은 허구

입력
2004.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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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자들은 고구려의 터전인 졸본성(지금의 랴오닝성 환런 오녀산성 일대)과 요동 지역을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기자조선과 진(秦), 한(漢)이 지배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고구려의 건국도 한 군현의 하나인 현도군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현도군의 통제를 받았음을 부각시키며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 중요한 논거로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하는 '한나라 때 고취(鼓吹·궁중의식 때 쓰는 악기)와 기인(技人)을 하사했으며 항상 현도군에서 의책( ·옷과 두건)과 조복(朝服·관원의 예복)을 받아갔고, 고구려 현령이 이들의 명적(名籍)을 관할했다'는 기록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동북공정에서는 종래 만주지역의 고구려는 중국사로,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로 보았던 이른바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시각을 넘어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도 중국사라는 극단적인 설을 제기하고 있다. 낙랑 등 군현의 지배력을 확대 해석하여 고대 중국이 한반도 서북부에까지 연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발전은 모두 중국 군현 내에서 이루어졌고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사의 일부라는 논리이다.

요동은 엄연히 고조선의 땅

고구려 족속의 기원과 더불어 고구려가 중원 왕조의 통치질서 즉 현도군의 땅에서 국가를 세웠고, 낙랑 등 중국 군현 안에서 발전했으므로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는 주장은 고구려사를 어느 나라의 역사로 볼 것이냐는 귀속 문제의 핵심적인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기자조선 이후 진, 한이 요동을 지배했다며 중국이 고구려사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데에는 너무도 허점이 많다. 기자동래설의 허구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고 '사기(史記)' '위략(魏略)' 등의 중국 사료에 따를 때 요동은 원래부터 엄연히 고조선의 땅이다. 기자를 비롯한 은나라 유민의 문화는 요서 일원에 한정된 짧은 시기의 국지 문화일 뿐이다. 전국시대 연나라가 동쪽으로 고조선의 땅 2,000리를 빼앗고 오늘날 요동반도에 있는 천산(千山)산맥 일대로 추정되는 만번한을 경계로 했다는 기록은 당시 요서 일부와 요동이 모두 고조선의 땅이었다는 증거다.

진한시대에도 '염철론'(鹽鐵論·기원전 1세기 전한 시대의 사서)의 '조선이 (진이 세운) 국경 요새를 유린하고 연의 동쪽 땅을 모두 취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고조선이 항상 밀린 것은 아니었다. 먼 옛날에 요동벌에서 일진일퇴한 사실을 두고 지금 새삼스레 역사적 연고권을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긴 하지만, 살핀 대로 요동이 원래 중국 땅이라는 중국학계의 일방적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현도군은 고구려 지배하지 않아

'삼국지'에 근거해 고구려의 건국이 현도군 내에서 이루어졌으며, 현도군의 통제를 받았다는 중국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고구려 건국 이전부터 환런(桓仁)을 비롯한 요동 일원에는 위만조선과 한 제국을 위협할 정도의 예맥계 정치세력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며, 현도군은 광역의 식민지 군현으로 기능했다기보다 이들 세력을 바탕으로 흥기하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창구 역할을 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중국이 고구려 지배의 근거로 들고 있는 대목이 나오는 '삼국지'의 같은 조에는 '고구려인이 군현의 동쪽 경계에 책구루( 溝婁·구루는 고구려의 성이라는 뜻)라는 소성을 쌓아두고 거기에서 의책을 가져갔다'는 기사가 나온다. 현도군이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한이 군현을 통해 고구려에 물자를 공급한 것은 위만조선이 붕괴된 후 동북아의 정세 변화에 따라 고구려가 한 제국에 압력을 가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한 유화외교책의 일환이었다.

'후한서'와 '삼국사기'에 이미 1세기 중반 고구려 모본왕대에 오늘날 베이징(北京) 부근인 허베이(河北)성의 우북평, 어양, 상곡 등지를 공략하고 태조왕대에는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종래 학계에서 이를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염철론'의 '좌장군 순체가 조선을 정벌하였으나… 연(燕) 제(齊)가 예맥에게 곤욕을 당하였다'는 기사와 맥을 같이하는 엄연한 사실이다. 즉 고구려는 현도군 안에 있던 소국이 아니라 건국기부터 기마병을 이용하여 중원 왕조의 본토를 위협하는 강력한 정복 국가였던 것이다.

낙랑군은 중국계 유이민 도시에 불과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사까지 중국사라는 동북공정의 주장은 고구려의 영역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매우 심각한 국면에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북부까지 온전히 중국의 땅이라는 주장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랑 등 군현의 지배력을 확대 해석해 고구려가 고대 중국의 영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사라는 이 같은 주장은 고구려가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건국했으므로 중국의 지방 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논리와도 모순되는 견강부회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낙랑군은 한 제국의 붕괴와 운명을 같이했던 군현이다. 무제 사후에는 이미 고구려의 압력을 피해 대동강 남안 토성리 일대에 잔존한 중국계 유이민의 자치도시에 불과한 세력으로 전락했다. 진번, 임둔은 도상(圖上)의 계획에 불과한 군현으로 그 존재조차 분명치 않다. 고구려가 중국 군현 내에서 발전하였다는 것은 억지로 고구려의 국가적 위상을 말살하고자 하는 의도에 불과한 것이다.

고구려는 새로운 천하질서의 중심

전성기인 광개토대왕과 장수왕대의 고구려는 만주 중심부와 한반도 북부는 물론 저 멀리 서요하의 상류인 시라무렌강 유역과 대흥안령(大興安嶺)을 넘어 동몽골 초원지역까지 진출했다. 광개토대왕비 영락 5년조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넘어 염수에 이르러 패려(거란족의 일부)를 정벌하고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헤아릴 수 없이 획득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요동지역을 순수(巡狩)했다'에 나타난 부산과 염수 및 우마군양은 당시 원정 지역이 대흥안령 산맥 남쪽 시라무렌강 유역임을 알려주고 있다.

'위서'(魏書·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역사서)에 따르면 더 나아가 장수왕대에는 대흥안령을 넘어 당시 막북(漠北)의 패자였던 유연(柔然)과 지두우라는 소수민족을 분할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 남쪽에 거주하던 거란의 부족이 북쪽으로부터 고구려가 쳐들어올 것이 두려워 중국 내지로 도망갔다는 기록으로 볼 때도 당대 고구려가 전투용 양마의 원활한 공급을 목적으로 대흥안령을 넘어 동몽골 초원지역에 진출한 것이 명백하다.

고구려는 중원민족과는 달리 천손(天孫)의식에 바탕한 강렬한 자존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원왕조의 통치 질서 안에 있기는커녕 서쪽으로 요하를 넘어 대릉하(大凌河) 유역으로부터 멀리 대흥안령을 넘어 동몽골 초원까지, 동쪽으로 두만강을 넘어 목단강(牧丹江) 유역부터 연해주 일원까지 진출했다. 또 북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북만주 일원으로 통치 영역을 넓혔고, 남으로는 한강 유역을 획득하는 한편 멀리 낙동강 유역에서 왜를 토멸하고 신라와 가야를 복속시키는 정복 전쟁을 통해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廣開土境)을 이루었다.

이뿐 아니라 '국부민은(國富民殷)'의 국력을 바탕으로 광개토대왕대에는 백제, 동부여, 신라, 가야와 북연(北燕) 등 여러 나라를 조공(朝貢) 바치는 신하국으로 복속시키는 한편 태왕호(太王號)와 독자적인 영락(永樂) 연호를 사용해 중원왕조와 대등한 동방의 새로운 천하질서의 중심임을 대외에 천명했다. 이는 당대 고구려가 중원왕조의 신속국이 아니라 팽창된 국력을 바탕으로 제국질서를 완성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 영 수 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 동북공정 변천과정

'동북공정'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고구려사 연구는 지금까지 3단계로 변해 왔다. 19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학계는 중국사의 범위를 확대해야 된다는 이론적 검토를 진행했으나, 고구려사에 대한 인식은 각종 교과서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한국사의 일부로 서술하여 표면적으로는 전통적인 견해와 별 다른점이 나타나지 않았다.

80년대부터 쑨찐지(孫進己) 등 일부 학자들이 종래의 연구를 비판하면서 고구려사를 중국의 지방사로 봐야 한다는 설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맹산을 비롯한 조선족 학자들은 '일사양용(一史兩用)'이라는 구호 아래 만주 지역에 도읍이 있었던 시기의 고구려는 중국사로, 평양 천도 이후의 고구려는 한국사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절충적 시각이 중국학계에서도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더 체계적으로 이념화하여 고구려사를 전면적으로 중국사의 일부로 보려는 학자들의 견해가 비등하기 시작했다.

특히 93년 남북한과 중국학자들이 참여해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열린 '고구려문화 국제학술토론회'에서 북한의 박시형과 쑨찐지의 논전을 계기로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편입설이 더 힘을 얻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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