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문열씨는 늘 현실정치의 자장 안에 머물러 왔다. 문단의 대표적 작가인 그는 정치담론이 치열한 단계로 치달을 때마다 목소리를 보탰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또 다른 주요 작가 김주영씨도 현실정치에 발을 들여놓아 눈길을 끌고 있다. 당은 갈라졌으나 모두 총선 공천심사위원을 맡았다. 전례가 없는 일이다. '문학사상'지가 임홍빈 고문의 글을 통해 그들에게 충고를 보낸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공천심사위원은 정당에서 힘깨나 쓰는 인물이 아니고는 넘볼 수 없는 자리다. 정치부패를 탄핵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고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따갑자, 문인을 모셔온 것 같다. 타성화한 쓸어내는 데 괄목할 만한 족적을 남겨주었으면 한다…>공천심사위원은>
두 작가의 역할은 물갈이다. 이 백면서생들이 물가에 나온 어린애처럼 위태로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임 고문이 '정치란 줄타기와 같다'는 노파심을 첨언하는 것도 당연하다. '전후좌우로 요동치는 줄타기란 잘해야 본전이고, 자칫하면 패가망신으로 전락하기 일쑤라는 교훈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백년하청(百年河淸)이란 한탄을 떠올린다. '황하가 늘 흐리어 맑을 때가 없다'는 뜻이다. 이문열씨의 탄식이 새나왔다. 한나라당의 싹수가 노랗고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막상 공천심사를 해보니 침몰하는 게 눈에 보여 자폭하고 싶은 기분"이라고 개탄했다. "인권탄압 논란의 대상자와 당내 대표적 보수인사를 자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들어와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무력감도 털어 놓았다. 당이 이런 고언에 귀 기울인다면, 그는 이미 큰 일을 한 셈이다.
환멸에도 불구하고 좌절하지 말고, 장편소설 작가의 뚝심으로 끝까지 제 몫을 해주기 바란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 물 맑히기는 한계가 있다. 시스템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4년 전을 돌아보면 감회가 쓰다. 당시 초유의 시민운동을 이끌었던 손봉호 서울대 교수는 선거결과에 꽤 만족해 했다.
<16대 총선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부패정치인 상당수가 퇴출된 것이다. 물갈이가 조금은 이뤄졌다. 언론과 시민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역시 총선시민연대의 낙선운동이었고, 그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운동은 일본에서 '시민연대 파도 21'이 출범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의 현실은 참혹하다. 시스템도 역부족이었다. 16대 국회에 '헌정사상 최악의 비리 국회'라는 오명이 붙게 된 것이다. 대선후보 주변인과 의원 13명이 구속되는 등, 20여명의 의원이 무더기 사법처리될 처지에 놓여 있다. 거의 모든 권력·금권의 실세들이 부정부패에 연루돼 있다. 정치경제인은 시민운동 전보다 더 타락했다.
그래도 두 갈래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다. 검찰수사와 또 다시 시민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이다. 새 정부 들어 검찰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어느 때보다도 소신 있고 신뢰할 만한 행보를 보여 왔다. 청빈한 정치판을 위해 한국판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를 이룰 듯한 행보에 박수를 보낸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사람들'이라는 정치인에게는 자정능력이 없다. 이권과 청탁 앞에 노출된 그들을 비리유혹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기업의 정치 후원금 자체를 불법화하고 지구당을 폐쇄해야 한다. 고비용 정치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본격적 시민운동 출범에 앞서 '국민참여 0415'라는 '친노(親盧)모임'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민운동의 편파성과 조급성은 경계되어야 하고, 동기의 순수성은 감시 받아야 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불협화음에도 불구하고, 당선운동이든 낙선운동이든 우리는 다시 한번 시민운동에 미래를 걸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지금의 후진국적 정치부패와 불신, 냉소주의를 극복하려는 신호다. 살아 숨쉬는 사회의 건강한 몸짓이다.
박 래 부 논설위원/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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