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인 둘째 녀석이 책읽기를 참 좋아한다. 글을 깨친 뒤부터 닥치는 대로 읽어 대더니 요즘은 묵직한 책들도 곧잘 뒤적거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녀석과 대화를 하다가 신경이 거슬리는 일이 잦아졌다."돈과 권력이 최고예요. 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굽실거리잖아요." "불우이웃 도우면 뭐해요. 은혜도 모르는데." 아이가 티 없이 순수하지는 못할망정,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유심히 들어 보니 인종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이 담긴 말을 자주 내뱉는 편이었다. 가벼이 넘길 수준을 넘은 것 같아 정색하고 따져 물었다. "너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 "누구에게 들은 게 아니라 혼자 생각한 거예요. 책을 읽다 보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들어요."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에 바위가 얹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책이 문제였을까? 휴일 내내 아이 방 책장을 뒤적거리다가, 손때가 묻어서 너덜너덜해진 한 베스트셀러 역사 만화 시리즈가 원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저자의 사회적 언동이 영 수준 이하라서 망설이다가 세계사 분야에 달리 선택할 책이 마땅치 않아 한 질을 들여 놓은 게 화근이었다.
"너 이 책들 몇 번이나 읽었니?" "10번도 넘게 봤을 걸요. 정말 재미있어요." 혹시 내가 오해한 건 아닐까 싶어 여기저기 자료를 찾아보았다. 역시 그 만화책의 유해성을 지적한 역사학자의 글이 이미 나와 있었다. 10번 이상 읽었다니, 아주 세뇌가 되었을 것 아닌가! 이 불온한 만화는 그날로 우리집 금서 1호가 되었다.
불량 서적이 호환, 마마나 불법 비디오보다 무섭다는 말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제발, 적어도, 어린이 책만은 함부로 만들지 말자!
한필훈 길벗 편집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