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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6> 방황과 새로운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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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알로에 인생 김정문 <6> 방황과 새로운 정착

입력
2004.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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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외로웠다. 세평 남짓한 싸구려 여인숙에서 홀로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서러웠다. 통영 촌놈이 경성사범학교에 합격했을 땐 개천에서 용 났다며 마을 잔치가 벌어졌었는데…. 위궤양과 류머티스 관점염, 신경질환에 견디다 못해 자살을 결심했을 때도 이처럼 고독이 사무치지는 않았다. 그런데 새벽녘 여인숙에서 잠이 깬 내겐 아무도 없었다. 고향과 가족을 등지고 객지를 떠도는 신세가 마냥 처량했다.1976년 봄이 되자 미국에서 수입한 알로에 베라도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관절염은 어느 정도 나았지만 완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 뼈마디가 쑤시는 고통에 진통제를 찾을 만큼 관절염은 끈질겼다. 빈혈과 코 알레르기, 그리고 1년이면 6개월 이상 달고 다닌 감기가 사라진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관절염 때문에 베라를 수입한 것으로 빈혈 따위는 견딜 만 했다.

그렇다고 베라를 또 수입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사실 4개월만 더 복용하면 완치될 수도 있겠다는 욕심이 났다. 하지만 2,000달러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애희 누나에게 다시 손 벌리기는 싫었다. 친구에게 헐값에 빌린 부평의 농장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알로에 묘목 구하기는 고사하고 비닐하우스 설치 작업도 혼자 맨손으로 해내기가 버거웠다.

베라가 도착한 75년 12월 이후 사업거리를 찾는다, 지인들의 의견을 들어본다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한 겨울이 후딱 지나갔다. 더 이상의 백수 타령은 곤란했다. 부산 대신동 농장은 남의 손에 넘어간 상태였다. 노모는 부산 변두리에서 손바닥 만한 밭떼기를 일구며 중학생인 두 손자를 어렵게 돌보는 처지였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얻어 쓴 용돈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라졌고 뚜렷한 기술이 없는 터라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었다.

결국 나는 솔잎을 찾는 송충이처럼 농장과 관련한 일로 되돌아갔다. 이번에는 보따리 장수로 나섰다. 서울 장안에서 가장 큰 중앙종묘에서 씨앗과 묘목을 산 뒤 부산과 진주는 물론 전라·충청도 등 전국을 전전했다. 나름대로 재기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이재에 둔한 내게 돈이 굴러들어 올 리 만무했다.

장사를 하는 동안 나는 동가식 서가숙의 유랑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사실상 홀아비 신세였으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영화로 외로움을 달랬다. 원래 별다른 취미가 없지만 영화는 평생 광적으로 즐겨왔다. 지금도 집에는 명화와 다큐멘터리 비디오테이프가 1,000개가 넘게 있다. "회장님 댁엔 집엔 책과 비디오밖에 없네요"라는 농담을 들을 정도다.

나는 아버지 때문에 영화광이 됐을 지도 모른다. 전남 여수가 고향인 아버지는 고아로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통영에 오게 됐고 교회에서 잡일을 했다. 그런데 음악 소질을 발견한 외국인 목사에 의해 나팔수 역을 맡게 됐다. 20세기 초 였던 당시는 교회에서 오르간 대신 나팔과 북을 반주로 이용했다고 한다. 그러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12세가 될 때까지 통영 봉래극장의 나팔대장을 했다. 영화 선전 간판을 등에 진 채 극장 광고에 나서는 선전대에서 나팔을 불었다. 덕분에 나는 영화를 공짜로 실컷 볼 수 있었다. 30∼40년대에는 서부영화와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는 물론 '이수일과 심순애' 등이 극장에서 상영 공연됐다. 평생 술을 좋아한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는 데는 소홀했지만 내게 영화감상이라는 훌륭한 취미를 선물한 셈이다.

2년 가까운 떠돌이 생활에 지친 나는 정착 생활이 너무 그리웠다.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살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그러나 내게 돌아갈 곳은 부평 농장밖에 없었다. 알로에 농장을 운영하는 게 하느님이 내게 주신 마지막 소명이라 여기며 나는 2년 동안 방치된 들판을 가꿔나가기로 했다. 또 다른 선택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심정으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때는 78년 2월이었고 내 나이 5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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