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1월31일, 미 육군 28보병사단 109연대 G중대 소속 일등병 에디 슬로빅이 프랑스 생트마리오민에서 처형됐다. 총살 당시 슬로빅의 나이는 25세였고, 그의 죄목은 무단 탈영이었다. 고향인 미시건주 디트로이트에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부 안투아넷이 살고 있었다. 슬로빅 일병은 남북 전쟁 이래 미국사에서 탈영죄로 처형된 첫번째 군인이었다. 그의 유해는 강간·살인 등의 죄로 처형된 다른 미군 병사 94명의 시신과 함께 페랑타르드누아의 우아젠 묘지에 묻혔다.슬로빅 일병이 미 육군 28사단 소속이었다는 것은 오로지 기술적 의미에서였다. 그는 1944년 8월20일 프랑스에 도착해 이 사단에 배치 받은 뒤 하루 만에 낙오병이 되었고, 캐나다군의 도움으로 본대에 합류한 직후 탈영했으며, 다시 하루 뒤 부대 소속 장교에게 자수한 뒤 구금돼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미 육군 28사단은 유럽 전투에서 공식 기록 26,286명의 사상자를 냈고, 그 가운데 전사자는 2,146명에 이르렀다. 슬로빅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더한다면 넓은 의미의 전사자는 2,147명이 될 것이다.
유럽 전선에서 슬로빅이 유일한 미군 탈주병은 아니었으나, 그는 여러 점에서 운이 나빴다. 그는 순진하게 곧 자수했고, 귀대시키면 다시 탈영하겠다고 진술했다. 법무관은 그가 귀대하면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겠다는 거래를 제의했으나, 슬로빅은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했다. 군법회의는 슬로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그는 유럽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장군에게 감형을 탄원했다. 그러나 슬로빅에 대한 너그러움이 다른 병사들의 탈영을 부추길 것으로 판단한 아이젠하워는 사형 선고를 확인했다. 슬로빅의 유해는 그로부터 42년이 지난 1987년 고향으로 이장됐다.
고종석
/논설위원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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