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땅을 휘감는 물줄기, 앞뒤로 솟아있는 산들. 그 사이에 들어선 널따란 들판. 그리고 오염되지 않은 자연이 선사하는 메밀 도토리 옥수수 등 청정 농산물. 이들 농산물로 만드는 두부 메밀묵 등등.어릴 적 시골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고향의 먹거리'가 강원 영월군 주천면에서 마치 꿈처럼 그대로 펼쳐진다. 단종(端宗)의 자취가 깃든 충절의 고향 영월의 초입에 자리한 주천면. 주민 4,500여명에 시내라야 면사무소 달랑 하나 있는 정도의 작은 촌이다.
최근 단종을 기리는 섶다리축제가 열리는 등 오지 아닌 오지인 이 곳에 '강원도의 맛'이 밀집 농축돼 있다. 메밀묵밥과 도토리묵, 다슬기와 콩, 옥수수, 고들빼기까지. 산이나 들이건, 논밭이나 강이건,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하거나 자연 그대로 채집한 것들로 음식을 만들고 식단까지 차려주는 이 곳 맛집들의 음식에는 자연의 숨결과 사람의 손맛이 그대로 배어난다.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에도 시골 인심과 순박함이 살아 있다. 이 겨울 영월 주천면으로 고향의 맛기행을 떠나보자.
/영월=글 사진 박원식기자 parky@hk.co.kr
메밀과 옥수수-신일식당 (033)372-7743
보릿고개 시절,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매일 메밀국수만 해줬다. 메밀로 만든 면발이 까끌까끌하고 푸석푸석해 입맛이 없던 아이들은 '꼴보기 싫다'고 '꼴두국수'라고 불렀다. 예전에는 주식이었던 이 국수를 이 곳 신일식당에서는 별미로 맛볼 수 있다.
안주인 임덕자(58)씨는 토종 메밀 100%로 뽑은 면발을 매일 반죽, 칼국수처럼 손으로 썰어낸다. 무 다시마 멸치를 넣어 만든 육수에 고명으로 김 참깨 마늘 등을 얹는데, 밀가루 면 보다 빨리 불어 서둘러 먹어야한다. 한 그릇 3,000원. 여름이면 자리가 없어 메어터지는데도 "왜 값을 올리지 않느냐"고 물으니 임씨는"500원이라도 올리면 동네 사람들이 못온다"며 고개를 젓는다.
메밀반죽을 옛날 식으로 솥뚜껑에서 얇게 부친 부침개도 여간 구수하지 않다. '과연 진짜 메밀일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부침개에 난 구멍들이 보인다. 밀가루를 섞지 않았다는 증거다. 파와 김치를 얹어 양념장에 찍어 먹어먹는 맛은 다른 데서 모방하기 힘들 정도. 바로 옆에는 무채가 놓여 있다. 메밀의 해독제다. 조선간장과 쪽파 청양고추를 섞어 만든 양념장도 시골맛 그대로다. 한 장에 500원. 아무리 먹어도 비싼줄을 모른다.
메뉴판에 있는 올창묵은 찰옥수수가 아닌 멧옥수수로만 만들 수 있다. 옥수수 녹말을 내서 바닥에 구멍이 보송보송 뚫린 올창이틀로 밀어 내는데 근기가 없어 짧게 끊겨 나와 올창묵이라고 불린다. 2,500원. 먹다 보면 들통에 들어 있는 노란 빛깔의 동동주 냄새가 풍겨온다. 위에 떠 있는 하얀 것은 좁쌀. 보기에도 맑아 보이는 것이 아무리 마셔도 머리 아플 일은 없다고. 한 항아리 3,000원. 손수 빚은 만두에도 김치가 푸짐하게 들어가 있다.
도토리-주천묵집 (033)372-3800, 인천분점(032)561-0405
주변에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과 무성한 참나무는 가을이면 도토리 천지다. 주천묵집은 알밤처럼 생긴 도토리를 주워다 만든 도토리묵으로 묵밥을 만든다. 묵을 채처럼 썰어 그릇에 듬뿍 넣은 뒤 육수를 붓고 김치와 김 참깨가 고명으로 얹은 '묵국'에 밥을 말아 먹는 음식. 한 그릇이 뚝딱 넘어간다. 다져서 삭힌 고추나 김치를 넣어 먹으면 맛이 더 살아난다. 5,000원. 메밀묵밥은 안주인 김순남씨의 아들이 농사지은 메밀로 만든 메밀묵을 사용한다. 묵을 매일 쑤는데 손님이 많은 날에는 그냥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노르스름한 색깔의 생두부모듬도 맛있어 보이는데 직접 김씨가 만든 손두부다. 8,000원. 순두부 찌개와 감자를 갈아 만든 감자수제비는 5,000원. 인천 분점은 가족이 같은 식재료를 가져다 운영한다.
두부-콩깍지밥상 (033)372-9434
비지장 순두부 모두부 두부찌개 등 밥상에 가득찬 두부 요리들. 콩깍지밥상은 직접 만든 두부 요리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옛날 방식으로 짚을 깔아놓은 소쿠리에서 생비지를 이틀간 띄운 비지장은 이 집의 전매특허. 신김치를 섞어 끓여 느끼하지 않으면서도 새콤하고 부드럽다.
주인 정장교씨가 직접 만드는 두부는 촌두부라서 그런지 고소하다. 소금공장에서 받아오는 추출물을 간수로 쓸 정도로 품질에 신경을 쓴다. 민물새우와 버섯 수제비가 들어가는 두부찌개와 양념장을 넣어 간을 맞춰 먹는 순두부, 청국장도 인기메뉴. 각각 4,000∼5,000원. 메주가루에 삶은 보리밥을 섞어 발효시켜 검은 색이 나는 막장은 쌈싸먹는데 빠뜨려서는 안될 메뉴.
다슬기-복미집 (033)372-8282
민물매운탕-판운식당 (033)374-0300
술 마신 후 뒤풀이에는 푸른 빛깔의 다슬기가 최고. 하천이 많은 이 동네에서는 다슬기를 골뱅이라고도 부른다. 복미집의 메뉴판에도 골뱅이라고 쓰여 있다. 안주인 전영옥씨는 음식을 만들고 남편은 다슬기를 잡아와 골뱅이전골과 골뱅이해장국을 내놓는다. 푸짐한 양인데도 1만∼1만5,000원.
국물은 육수와 된장을 같이 넣어 구수하면서도 시원하다. 육수는 골뱅이 껍질 무 파 등을 넣고 오래 끓여내는데 삼베보자기에 싸서 끓인다고. 다른 포대기를 쓸 경우 환경호르몬이 나올까 봐서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슬기의 꼬리가 길다. 전씨는 "수입산은 대부분 꼬리가 이렇게 길지 않다"며 냉장고에서 파란 진액이 흘러나와 얼어 있는 골뱅이를 보여준다. 아욱과 숙주나물 부추 팽이버섯에다 당근 시금치 수제비도 들어가 있다.
사방에 하천이 많으니 민물고기도 많다. 판운식당은 주인 신용석씨가 직접 잡은 민물고기들로 매운탕을 끓여준다. 까만 빛깔에 쏘가리 다음으로 맛있다는 육식성 어종인 꺽지와 모래 많은 곳에 서식하며 은빛이 나 얼음치와 비슷한 메자, 수심깊은 곳에서만 잡히는 잿빛갈의 뚜꾸베, 모래에 파묻혀 있다 먹이가 나타나면 사냥에 나서는 모래무지, 여울목에 많이 보이는 돌라리, 피래미 등 이 곳에서 잡히는 토종어종들이 주재료. 이 집 수족관에서는 살아있는 이들 생선들을 직접 볼 수 있다.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반반씩 풀어 끓인 매운탕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하다. 쑥갓과 미나리 버섯 마늘 풋고추 수제비를 넣는 것은 필수. 2만∼2만5,000원. 고기를 잡으면 수분이 빠지지 않도록 물에 넣어 얼려 보관했다가 사용하는 것이 신씨의 맛 유지 노하우다.
별미-도리뱅뱅이-술익는마을 (033)372-0277
섶차-섶다리찻집 (033)374-9108
주천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기름으로 튀겨 프라이팬에 원형으로 두른 뒤 양념을 발라 구운 도리뱅뱅이는 시내에 자리한 주점 술익는마을에서 맛볼 수 있는 메뉴다. 쌀로 빚은 동동주인 발랑주는 이 집의 대표 주종. 술이 담겨진 양동이에 술잔을 직접 넣어 떠서 마시는 것은 이집의 주법이다. 안주로 먹는 도리뱅뱅이는 고소하면서도 얼큰한 양념맛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서강을 사이에 둔 미다리와 밤디 두 마을. 정식 다리가 없이 섶다리(나무로 임시로 만든 다리)만 놓여 있다. 다리 바로 옆에 자리잡은 조그만 초가집. 섶다리찻집이다. 가마니 바닥에 통나무 테이블, 통나무 의자, 허름한 실내 한가운데 장작불을 피워 놓은 드럼통 화로에서는 군고구마가 익어가고 물주전자가 끓는다. 주인 장광수씨가 개발한 섶차를 끓이는 물이다. 칡과 엄나무 가시오가피 허깨나무 솔잎 느릅나무 등 각종 약재를 넣고 끓인 섶차에서 나는 은은한 자연 향은 한번쯤 맛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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