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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18>포르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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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018>포르셰

입력
2004.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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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30일 딱정벌레형 폴크스바겐 원형의 설계자이자 자동차 회사 포르셰의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가 76세로 작고했다. 포르셰는 여러 점에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우선 국적. 포르셰의 본사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고, 그 설립자의 활동 무대도 주로 독일이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돼 있던 시절말고는 독일인이었던 적이 없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보헤미아 북부의 마터스도르프라는 마을인데, 그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다. 그래서 포르셰의 첫 국적은 오스트리아-헝가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로 1918년 보헤미아, 모라비아, 슬로바키아를 아우르는 지역이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자 포르셰는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이 되었고, 1930년대 말에야 오스트리아 국적을 취득했다.다음 학업. 생전의 포르셰에게 붙여진 공식 이름은 독일어로 독토르 포르셰, 곧 포르셰 박사였다. 그러나 그가 받은 정식 공학 교육은 10대 말 빈 기술대학 야간부를 잠시 다닌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비범한 재능과 그에 따른 명성 덕에, 그는 학교를 그만둔 지 24년 만에 모교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어 슈투트가르트 기술대학도 그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다음은 정치. 포르셰가 적극적인 파시스트였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에게 협력했고, 그 때문에 종전 뒤 프랑스군에게 체포돼 디종에서 20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기 직전 프랑스 측 요청으로 르노 4 CV를 설계했다. 경주용 자동차 설계에 미쳐 한 때는 레이서 노릇을 하기도 한 포르셰의 손길은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만이 아니라 다임러, 폴크스바겐, 르노 등 20세기의 대표적 자동차 회사들과 밀접히 연결돼 있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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