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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5> 알로에 사업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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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알로에 인생 김정문 <5> 알로에 사업을 생각하다

입력
2004.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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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문제였다. 미국 대사관 직원은 알로에 베라를 간절히 찾던 내게 "베라를 팔겠다는 미국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알려줬다. 미국의 알로에 베라 농장과 무역 회사 리스트도 주겠다고 했다. 배려는 고마웠다. 하지만 베라 수입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 땅의 선인장 농장에서 알로에를 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진실(베라)을 찾은 기쁨은 사라지고 "무슨 수로 알로에를 수입한단 말인가"라는 고민이 나를 옥죄었다. 수입절차는 물론 얼마를 주고 어느 정도를 사야할 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허나 죽으란 법은 없었다. 큰 사위 최성철(59·캐나다 목사)이 무역하는 친구에게 부탁해 보겠노라고 했다. 그 친구는 공짜로 수입을 대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대략 견적을 뽑아보니 2,000달러는 필요했다. 그 돈이면 1㎏짜리 베라 생 잎 100개는 구할 수 있었다. 4개월은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1975년 9월 당시 내겐 부산 대신동에 2,500평 규모의 농장이 있었다. 하지만 건강 때문에 농장을 내 팽개친 채 5년 동안 방치해 빚이 쌓여 갔고 남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기댈 언덕은 피붙이밖에 없었다. 애희 누나는 원래 8남매였던 우리 형제 중 그나마 유복했다. 부산 동래에서 매형과 함께 주유소를 운영했던 누나는 "죽을 줄 알았던 네가 살아났는데 뭐가 아깝겠냐"며 선뜻 300만원을 주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누나가 넷이었는데 셋째인 애희 누나를 제외하고 셋이 모두 30세 전에 세상을 등졌다. 2명의 여동생도 40세를 겨우 넘기고 숨졌고 세 살 터울의 유일한 남동생 정실이는 22세에 결핵성 복막염으로 죽었다. 정실이는 "형, 내겐 그 비싼 항생제도 소용없어. 형이나 건강하세요"라는 유언을 남기고 허망하게 떠났다. 이렇듯 나의 가족사는 단장(斷腸)의 아픔으로 얼룩졌다.

두 달이 훌쩍 지난 75년 11월 미국에 베라를 주문했다. 베라는 항공편으로 12월 서울에 도착했다. 그 무렵 나는 알로에를 직접 재배하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각종 알로에의 특성과 약효는 물론 재배방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통달한 상태였다.

땅도 돈도 없는 나는 일단 아는 사람을 통해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 때 친구 이연호(96년 작고)가 인천 부평에 제법 땅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중에 남양알로에를 창업, 업계 라이벌이 된 그는 21세 때인 48년 봄 부산에서 인연을 맺었다. 당시 나는 목사가 되고자 고려신학교에 입학했고 그는 3개월 과정의 초등교원양성소를 다녔다. 우리는 기독학생동지회라는 서클을 하면서 제법 가까워졌다. 그에게 700평의 땅을 싸게 빌려주겠다는 다짐을 받은 나는 우선 2개 정도의 알로에 온실을 꾸미기로 했다. 몸이 낫고 돈도 번다면 정말 멋지게 써야겠다는 다짐도 수없이 되풀이했다.

실제 나는 사업을 하면서 좋은 일이라면 기부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경제정의실천연합은 89년 출범 때부터 나와 인연이 각별했다. 87년 장애우 권익문제연구소에서 만난 경실련 사무총장 서경석 목사는 나와 호형호제할 만큼 친한 사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하기 싫어하는 서 목사지만 정말 어려울 때면 가끔 찾았다. 그러면 나는 "사회를 깨끗하게 만든다는데…"라며 적지 않은 금액을 내놓았다. 지금 온 나라를 들끓게 하는 정치자금과 달리 그야말로 개혁에 대한 기대밖에 없는 깨끗한 돈이었다.

베라를 먹어도 류머티스 관절염은 끈질기게 따라 다녔다. 보름 정도 복용으로는 효과를 느낄 수 없었다.

그나마 한 달이 지나자 새벽까지 잠 못 이루게 했던 격통(激痛)은 가셨지만 위장병이 낫는 속도와는 완연히 달랐다. '이상하다' 하는 불안감과 '관절염도 별 수 없겠지'라는 희망이 뒤섞인 상황에서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당시 나는 호구지책을 마련해야 할 처지였다. 알로에 사업은 머릿 속에만 그려진 이상(理想)일 뿐 현실은 너무도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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