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판을 바라보는 민심이 예사롭지 않다. 어떤 의미에선 가혹하리만치 냉혹하다. 설 연휴 직후에 실시된 한국일보의 여론조사는 이번 총선에서 현역의원을 찍겠다는 응답이 겨우 14%라는 놀라운 결과가 나왔다. 유권자들은 물갈이 정도가 아니라 숫제 판갈이를 요구하고 있다. 여와 야를 가리지 않고, 기존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임을 드러냈다.사태의 심각성을 간파한 각 당의 지도부가 대대적인 물갈이 공천방침을 밝히는 등 부산을 떨어보지만 성난 민심은 요지부동이다. 과연 그들이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까지 감수하겠느냐 며 오히려 냉소적이다. 또 도마뱀 꼬리 자르듯 적당한 선에서 타협, 위기를 넘기려 하지 않겠느냐 하는 불신이 팽배하다.
개혁은 기득권자가 자신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사람이 개혁의 주체이자 대상이어야 옳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도도한 흐름에서 자신만은 예외이기를 바란다. 온갖 핑계나 명분을 들이대며 헛된 요행수를 기대한다. 이런 수구(守舊)가 많으면 많을수록 개혁은 저항을 받거나 공염불에 그칠 공산이 크다. 정치란 마약과도 같다고 한다. 한번 발을 담그면 빠져 나오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80대의 JP가 다시 '한번만 더'를 외치며 절치부심하는 일이나, 드물게 전국구만 내리 세 번이나 연임한 야당소속 어느 여성의원이 "간택하듯 여성을 영입해서 써 먹고는 후궁처럼 버린다"며 재기를 모색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정치의 마약성향' 탓 일 것이다.
JP가 어느 때 JP인가. 또 그 여성의원은 얼마나 수완이 좋았기에 전국구 의원을 내리 세 번씩이나 했는지 모르지만 물러날 때를 아는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다. 입장할 때 받는 박수보다 퇴장할 때 얻는 박수가 더 값지다고 하지 않는가. 다음 국회에서 '충청도 교섭단체'를 구성한 후 물러나겠다는 JP의 궤변은 듣기조차 거북하다. 이 백전노장이 한국정치의 가장 큰 퇴행적 요인이 지역주의 정치라는 것을 모를 리 없을 터인데도 말이다.
16대 국회는 이미 12명의 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금배지를 뗐다. 또 각종 비리로 30여명이 기소돼 법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 앞으로도 대선자금비리 등으로 얼마나 많은 의원들이 낙마할지 모른다. 이런 추세라면 16대 의원의 20∼30% 정도는 물갈이가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번 총선이 부패정치 청산의 원년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 아니 그래야 한다. 각 당은 비리혐의로 검찰 소환을 받은 인사들은 공천에서 일단 제외할 움직임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비리는 불법대선자금에 한정돼 있다. 이 보다 죄질이 더 나쁜 범죄는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차제에 단체장 공천을 둘러싸고 거액이 오간 사실상의 매관매직 행위도 뿌리뽑아야 한다.
거액의 불법공천헌금 수령자가 어디 경북 경산 청도의 박재욱, 청송 영양 영덕의 김찬우 두 의원 뿐이겠는가. 한나라당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영남과 민주당 아성인호남에서는 시장 군수의 공천을 싸고 수 억대의 불법자금이 특별당비 또는 공천 헌금명목으로 전해진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특히 영남이 심했다고 한다. 검찰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수사의 칼날을 들이대야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기성정치인 스스로가 민심을 따라 행동하는 일이다. 이미 여야 의원 중엔 "나의 시대는 끝났다"며 용퇴하는 이가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지역주의에 기대 연명하려는 호남의 몇몇 구태 인사 등은 민심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분당사태도 사실은 이들이 기득권 포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51세의 젊은 리더십, '정동영 효과'를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을 단숨에 제1당으로 밀어올린 이 괴력의 원천은 바로 세대교체다. 2위로 주저앉고, 우리당의 3분의 1 지지도 얻지 못한 이유를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 깨닫지 못한다면 총선결과 역시 보나마나 일 것이다.
노 진 환 주필 Jhr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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