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삼청동이 이색 패션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선재아트센터를 기점으로 소격동에서 삼청동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s자형 거리. 허름한 수제비집과 고물가게, 세탁소와 등을 맞댄 낮은 한옥들 사이로 패션전문점들이 하나 둘 빼꼼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더니 불과 1,2년새 거리를 형성했다.삼청동 패션거리는 개발 포화상태인 인사동 문화벨트가 하나둘 북진하면서 생긴 것으로 고즈넉한 전통문화와 고집스러운 쟁이정신이 만나는 공간이다.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해 독특한 개성을 담은 패션상품들은 삼청동 거리에 언더그라운드 문화의 신선미를 더하면서 패션인들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선재아트센터와 정독도서관을 마주하고있는 허물어질듯한 건물 1층에 자리잡은 ‘보떼’. 무대의상 디자이너 김정은씨가 2년전 문을 연 패션점이다. 7평 남짓한 공간 한쪽엔 김씨의 재봉틀이 놓여있고 허름한 소파에선 생후 7개월짜리 첫 아들이 조각천을 놀이개 삼아 물고빨고 있다.
선반엔 미처 솔기를 박지못한 재킷은 물론, 고깃고깃한 거즈로 만든 두겹 원피스, 온갖 종류의 손수건을 이리저리 패치워크한 배냇저고리 스타일의 볼레로 등이 다양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언뜻 보기에도 ‘작가’의 정신이 느껴진다.
1, 2년새 패션거리 변신… 독창성이 생존 조건
보떼는 워낙은 영화 ‘접속’ ‘조용한 가족’, 뮤지컬 ‘고려의 아침’ ‘록 햄릿’ 등의 의상을 만든 김씨가 작업실로 쓰기위해 마련한 공간. 그러나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듯한 삼청동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아예 이곳에서 자신의 고유 브랜드 보떼를 오픈했다.
“조용해서 옷을 사러오는 사람들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의외로 방문객이 많고, 대부분 화랑이나 아트센터에 볼 일이 있어 나온 예술계통 전문인들이예요. 나이도 20대 후반부터 40대까지 폭넓구요. 나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 대중성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삼청동은 그런 창의성을 중시하고 평가해주는 분위기를 지녔어요. 이곳에서는 다들 독특한 뭔가를 내놓으려고 노력해요.”
작품전시 등 문화공간으로 영역 확장
보떼처럼 삼청동에서는 오리지낼러티(Originality·독창성)를 갖추지않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 삼청동 패션가의 터줏대감격인 모자전문점 ‘루이엘’은 프랑스 파리의 모자전문학교 C.M.T.의 아시아출신 졸업생 1호인 천순임씨가 1999년도에 문을 열었다.
오픈 당시 맞은편 페인트가게 주인이 ‘한 달을 못버틸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으나 현재 본점외에 서울에 5개의 매장을 열 만큼 성공했다. 삼청동점은 중장년층 여성들이 여유있게 커피 한잔을 마시며 모자를 써보고 담소를 나누는 문화공간으로 자리잡았다.
“삼청동 대로도 아니고 이 구석진 골목길까지 찾아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흡인력이 있다는 거잖아요. 20대 젊은이들을 위한 캐주얼한 모자가 아닌, 멋을 아는 중장년층을 위한 모자 브랜드는 거의 없거든요. 우리 모자가 보통 10만~20만원대, 아트 모자는 30만원대 이상이지만 고객들에게 가격은 문제가 되지않아요. 마음에 드는 특별한 모자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으니까요.”
소격동 길이 삼청동 길로 합류하는 지점에 지난해 9월 문을 연 ‘더 앤틱’도 독특한 디자인의 구두로 일찌감치 패션인들이 눈도장을 찍은 곳이다. 중국풍 앤틱가구 위에 디스플레이된 구두들은 동양의 공주들이 신었음직한 화려한 모피와 비즈 장식이 호사스러운 멋을 한껏 연출한다. 고가 명품구두와 평범한 내킬觀洹5?구두에 염증을 느끼는 멋쟁이들을 겨냥한 것으로 살롱구두다운 패션감각이 살아있다.
독창성 만큼이나 삼청동 패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이다. 삼청동 패션거리의 딱 중간에 위치한 ‘목가’는 평범한 가정주부 김남진씨가 연 토탈패션점. 대학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김씨는 모든 상품들을 본인이 직접 디자인하고 만드는 것은 물론 매장 지하에 작은 전시공간을 마련, 예술인들을 위한 무료 전시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삼청동길은 자기 세계가 확고한 사람들, 예술가들,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예요. 여기서 옷 팔아 돈 벌겠다는 생각대신 삼청동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이들과 함께 이 거리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하고싶어요.”
이밖에도 삼청동에는 디자이너 윤현택씨가 운영하는 의류점 ‘홍조’를 비롯 음반 아트디렉터로도 일하는 패션디자이너 허유씨의 맞춤 및 편집의류 매장 ‘램’, 금속공예가 김미정씨의 액세서리숍 ‘카르마’ 등이 속속 문을 문을 열고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사진=김주성기자 poem@hk.co.kr
■패션특구 지킴이, 루이엘의 천순임씨
“개인적으로는 삼청동 패션거리 붐이 반갑지않아요. 조용한 문화의 거리가 갑자기 북적이는 관광지로 변질되는 것 같아 두렵거든요.”
모자전문점 루이엘을 운영하는 천순임(40)씨는 삼청동 패션거리의 터줏대감이다. 1999년 눈이라도 내리면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고적했던 이 거리에 처음 가게를 열어 삼청동 문화에 패션을 접목시킨 주인공. 국내서는 찾아보기 힘든 디자이너브랜드 모자가 삼청동 주변 문화예술인들의 지지속에 성장했기 때문인지 삼청동에 대한 그녀의 애착은 남다르다.
“삼청동은 허름해 보이지만 자존의식이 강한 동네예요. 주민들도 건축가나 미술가, 연극인 등이 많고 그래서인지 오리지낼러티를 높이 평가하지요. 소위 명품이나 하이패션 브랜드 보다 이름값은 떨어질지 몰라도 독창성 만큼은 어디에도 지지않는다는 자존심이 있어야 이 거리에서 생존할 수 있어요.”
삼청동 패션거리의 부상에 대해 “지나치게 상업화된 인사동 문화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새 둥지를 찾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천씨는 그러나 성공적 정착여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한다.
“한 1,2년 사이 가게가 굉장히 자주 바뀌었어요. 처음엔 새 점포가 들어서면 다들 가서 이웃사촌이라고 인사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 아예 안가요. 한두달만에 문 닫는 곳도 많거든요. 1년 정도는 버텨야 동네식구라고 생각하고 그때 가서 인사하지요. 삼청동 패션거리가 조성되니까 엄청 장사 잘되나보다 생각하는 것 같은데 실제로 장사가 되는 거리는 아니예요. 유동인구가 많아지긴 했지만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아진 것이지, 고객층은 그대로이거든요.”
/이성희기자
■패션특구 걸림돌
삼청동 패션가가 조금씩 입소문을 타고 알려지면서 요즘 소격동에서 삼청동에 이르는 이 신흥 패션거리에는 미묘한 긴장감도 흐르고있다. 조용한 주거환경이 유지되기를 원하는 토착주민들과 패션거리의 붐에 기대 개발이익을 챙기려는 가두점주들의 신경전 때문이다.
2년전 삼청동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반해 이대앞 매장을 접고 이곳으로 옮겨왔다는 카르마 김미정씨는 "인사동이 난개발로 포화상태가 되면서 매장을 삼청동쪽으로 옮기려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점포주인들이 월세를 계속 올리는데다 패션매장 대신 카페나 레스토랑을 내려는 사람들도 많다"고 귀띔한다.
김씨의 경우 내년에는 월세부담 때문에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할 처지. 김씨는 "바람이 있다면 이 곳이 유흥가로 변질되지않고 자기색깔이 분명한 사람들이 쟁이정신을 갖고 깃드는 곳으로 계속 남았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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