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이 변화의 거센 물결에 몸을 실었다. 철거된 낡은 의자, 깨부순 계단과 건물 내벽. 남산에 둥지를 튼 지 31년 만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에 돌입한 흔적이 곳곳에 눈에 띈다. 그러나 변화와 혁신의 바람은 단지 껍질을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국립극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립극단이 말 그대로 '국립'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모습으로 태어나기 위해 2004년 벽두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껍질을 깨부수는 작업과 안에서부터의 개혁을 추구하는 프로젝트가 동시다발로 이루어지는 셈이다.예술 감독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한지 한 달, 국립극단은 이윤택(52) 신임 예술 감독이라는 이방인의 손에 의해 새롭게 거듭나고 있다. 이윤택 예술감독 출범이래 국립극단 배우들은 바빠졌다. 이 감독이 취임 이후 지난 5일부터 배우 재교육 과정을 새롭게 선보였기 때문이다. 오전 9시 영어회화를 거쳐 마임, 몸풀기로 구성된 신체 훈련을 받고 발성, 공연예술사, 체험 연기론 등의 연기론 수업을 받는다. 12시 30분까지 빡빡한 교육 프로그램을 받고 나면 퇴근 시간인 오후 6시까지 연습 시간이 남아 있다. "뭔가 긴장감이 들고 신선한 것 같아 좋아요." 한 국립극단 배우의 증언처럼 이 감독의 이러한 새로운 실험은 현재까지는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감독이 국립극단에 "생기와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 벌여놓은 일은 이것 말고도 더 있다. 국립극단이 창단 54년 동안 이룩해온 전통과 정체성 찾기가 바로 그것이다. 국립극단은 제 201회 정기공연으로 4월 1일부터 7일까지 '뇌우', 13일부터 19일까지 '인생차압'을 잇따라 선보인다. 리얼리즘의 살아있는 교과서로 불리는 두 작품을 이윤택 감독 체제하에서 첫 작품으로 내놓는 것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뇌우'와 '인생차압'이 1950년대 국립극단을 대표하는 레퍼토리로 선정된 것이다.
'뇌우'는 중국 극작가 차오위가 1934년 스물 넷의 어린 나이로 발표한 처녀작으로 중국 근대극의 출발점으로 불린다. 잔존하는 봉건제도의 굴레와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갈등을 겪는 중국인들의 자화상을 근친상간으로 파탄에 이르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예리하게 그려냈다. 공연 시간만 네 시간에 이르는 대작인 '뇌우'가 국내에서 초연 된 것은 지난 1950년. 당시 국립극장 극장장이던 동랑 유치진 선생이 연출을 맡고 백성희, 김동원 같은 당대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았다. "우리는 작품이 좋아서 공연 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차오위가 중국 공산당 고위 간부라서 깜짝 놀랐죠. 사실이 알려진 뒤론 무대에 올릴 수가 없었어요." 국립극단의 원로단원인 백성희(79)씨는 그때를 그렇게 회고했다. '뇌우'는 88년에야 금지조치가 풀려 이해랑 연출로 다시 무대에 올려질 수 있었다.
한편 '인생차압'(오영진 작)은 친일에서 친미로 변신을 거듭한 이중생의 성공과 허망한 몰락을 코믹하면서도 사실적으로 다룬 당대의 화제작.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라는 원제로 우리에게 더 익숙한 이 작품은 지난 58년 유현목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또 한번 유명세를 탔다.
"국립극단은 굉장히 뛰어난 자질을 가진 집단이에요. 관치로 인해 위축된 자율성을 회복하고 국립극단 고유의 정체성 찾기가 성공한다면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데 1년이면 충분 할 겁니다." 이윤택 예술 감독은 자신이 벌여놓은 사업에 그렇게 자신감을 보였다. 과연 우리도 21세기에 걸 맞는 위상을 지닌 국립극단을 갖게 될지 이윤택과 국립극단 배우들이 함께하는 실험과 변혁의 결과를 지켜볼 일이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