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한 번 시계를 들고 SBS '천국의 계단'(수·목 밤 9시55분)을 보자.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약 20분 단위로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는.처음에는 정서(최지우)와 송주(권상우), 혹은 정서와 태화(신현준)의 행복한 모습이 나온다. 이어 큰 사건이 하나 벌어지면서 서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약속이나 한 듯 서로가 서로를 찾아 뛰어다니고, 만나고 나면 슬프면서도 그렇지 않은 척 장난치듯 대화를 한다. 얼마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을 되찾는다. 그러나 또 몇 분이 지나면 다시 정서의 새엄마(이휘향)나 유리(김태희)에 의해 사건이 벌어지고, 이들은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한다.
새엄마에게 학대를 당하든,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상실증에 걸리든, 혹은 몇 년이 지나서 그 후유증으로 안암에 걸리든 간에 이 과정은 똑같이 되풀이된다. 정서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한 번 당할까 말까 한 일을 몇 분 단위로 겪지만, 그 사건이 끝나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웃는다. 어쩌면 정서의 기억상실증은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분 단위로 엄청난 사건들이 벌어지고, 그런데도 주인공은 그 모든 것을 참고 아주 착하고 바르게 살아간다. 당연히 사건의 개연성이나 캐릭터의 현실성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들은 오직 화 내고 슬퍼하거나, 웃고 기뻐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만 반복한다. '천국의 계단'의 문제는 억지스러운 스토리뿐만 아니라 그 스토리 속의 인간이 인간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그들에겐 일상의 평범한 대화란 아예 없는 듯하다. 제작진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천국의 계단'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요소들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쉴 새 없이 자극을 줄 수 있다. 극단적인 사건과 그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변하는 등장인물의 감정은 시청자에게 계속 일정한 자극을 전달한다. 자극이 계속된다는 건, 재미있지는 않아도 최소한 심심하지는 않다는 말과 통한다. 아무리 욕을 하고 짜증을 내도, 슬프게도 TV 드라마는 '잘 만든 심심한 드라마'보다는 '못 만들어도 자극적인' 드라마가 시청률이 높게 나온다. 이 드라마가 남매간의 사랑, 악독한 새엄마, 악녀, 교통사고, 기억상실증, 그룹 후계자, 시한부 인생 등 기존 트렌디 드라마의 온갖 설정들을 다 쓰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무시한 채 자극을 계속 이어가려면 끊임없이 충격적인 사건들이 필요하니 말이다.
'천국의 계단'은 시청률이라는 계단을 더 높이 오를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볼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씁쓸함을 안겨준다. 정말 드라마란 것이, 보면서 비웃든, 혹은 짜증내며 욕하든 보게 만들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장르인가.
한 때 SBS '아스팔트 사나이' 같은 작품으로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인정 받았던 이 드라마의 연출자 이장수 PD는 알고 있을까. '천국의 계단'이 제목을 빌린 레드 제플린의 곡 'Stairway To Heaven'이 '모든 반짝이는 것이 금은 아니'라고 노래하듯, 높은 시청률이 늘 시청자의 '진정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대중문화평론가 lennonej@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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