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적 관점에서라면 황진이(黃眞伊)와 허난설헌(許蘭雪軒)을 라이벌로 설정하는 발상 자체가 맹랑한 일일 것이다. 한쪽은 근본조차 알 수 없는 하층의 기녀, 다른 한쪽은 명문가에 태어나 문벌 사대부 집안으로 시집간 양반 여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전자가 남긴 작품은 여기저기 흩어져 전해오는 시와 노래를 모두 합쳐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인데 비해 후자는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최초로 210여 편의 작품이 시집으로 엮어져 전해오며, 조선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먼저 각광 받아 고국의 남성 사대부들을 당혹스럽게 했다.두 사람은 두 세대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태어난 데다 요절했기 때문에 같은 하늘 아래 산적이 없다. 하지만 둘 다 문예(文藝)가 남성의 독점 기호이자 표상 체계였던 조선중기에 시가(詩歌)로 그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이다. 가부장의 규율 아래서 자신들의 새로운 언어를 쏟아냈고, 여성의 독특한 정감과 상상력을 펼쳤다. 말하자면 남성적 언어 영토에 타자의 언어를 배태한 선구적 여성 문인들이라는 점에서 견주어 볼만한 자격이 있다.
선녀와 메두사의 두 얼굴, 황진이
황진이의 삶은 소문으로 떠돌던 것을 문인들이 짤막한 일화(逸話)로 옮겨 전한 것이 전부다. 그 이야기들은 전승과정에서 굴절되고 과장되었기에 그녀의 본래 모습을 선명하게 되살피기는 어렵다. 황진이는 주로 중종 연간을 살았으며, 서른 예닐곱의 생애를 보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녀의 가계와 출생 및 기녀가 된 동기 등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많다. 심지어 선인(仙人)과의 로맨스로 태어난 천상계의 후예였음을 암시하는 기록까지 있다. 혈통상 선녀라는 대목은 뻔한 허구일 터이지만, 탁월한 재예와 빼어난 미모로 당시의 사람들에게 선녀라고 불렸다는 기록은 진실에 가까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녀에게 괴이한 면모가 있어 주목을 끈다. 이덕형은 '송도기이(松都記異)'에서 황진이가 비록 창기이지만 몸치장을 일삼지 않고 천금을 준다 해도 시정의 천한 족속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전했다. 허균의 '지소록(識小錄)'에서는 일찍이 산수유람 끝 무렵에 나주에 이른 황진이가 고을 원님과 절도사가 벌인 잔치자리에서 해진 옷과 때 낀 얼굴로 태연스레 이를 잡으며 노래 부르고 거문고를 타되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조선시대 기녀의 중요한 존재의의가 남성들의 성적 욕망 해소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는 일부러 외모를 더럽게 하여 남성들의 욕정을 화석화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 신화에서 미모를 겨루다 여신의 저주를 받아 머리카락이 뱀으로 화한 메두사가 그녀를 바라보는 이를 모두 화석화했듯. 메두사는 남성의 권위에 저항하거나 냉소하는 여성의 표징으로 재해석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황진이가 보여준 삶의 태도와 닮은 꼴이다.
몇몇 일화에서 그가 육탄 공세까지 감행하면서 남근중심주의를 조롱하고, 남성의 허위성을 폭로했던 점이 나타난다. 예컨대 왕실의 종친 벽계수가 황진이의 재색(才色)에 초연하리라고 장담했다가 그녀의 노래 한 곡조에 정신을 잃고 나귀에서 떨어졌다는 얘기, 30년을 면벽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렸던 지족선사가 그녀로 인해 한 순간에 파계했다는 얘기 등에서 황진이가 남성을 대하는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황진이가 모든 남성을 이렇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 황진이가 맺은 참된 인간관계는 두 부류의 인간형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신분적, 성적 경계를 넘어 진실한 교감을 나누고 서로의 존재가치를 소중하게 여겼던 서경덕 소세양 같은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고도의 예술세계를 매개로 소통했던 지음(知音)의 인물인 이사종과 명창 이언방 등이다. '어저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던가…'와 같은 시조에서 섬세한 내면 정감을 진솔한 시어로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따스한 인간 이해와 애정이 밑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규방과 천상 사이의 배회, 허난설헌
황진이가 여성들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현실에 맞서 당당하게 겨루는 자세를 취했다면, 허난설헌은 상상적 세계로 도피해 자유를 구가하는 데서 탈출구를 찾았다. 이 같은 대응방식의 차이는 교방의 기녀와 사대부가의 부녀라는 신분적 차이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허봉과 허균을 형제로 두고, 이달에게 시를 배웠던 허난설헌의 불행은 15세 무렵 김성립과의 결혼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김성립은 문장과 학식이 그녀에 미치지 못했고 부부간의 금실도 좋지 않았으며, 고부간의 불화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근원적으로는 조선시대의 폐쇄적 가족제도와 이에 어울릴 수 없던 허난설헌의 자유로운 영혼에서 이유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규방에 안주하지 아니하고 중문 밖의 세계를 동경한 그녀에게 어느 가문인들 족쇄가 아니었겠는가.
'때 낀 거울이라 난새도 춤 멈추고(鏡暗鸞休舞)/ 빈 들보라서 제비도 돌아오지 않네(樑空燕不歸)/ 향내는 아직 비단 이불에 남아 있고(香殘蜀錦被)/ 눈물은 하염없이 비단옷을 적신다(淚濕越羅衣)…'( '이의산체를 본받아(效李義山體)'에서)
규방여인의 고독과 슬픔이 짙게 배어 나는 작품이다. 잡혀온 새장 속의 난새가 먹지도 울지도 않다가, 거울에 비춰주니 슬피 울다가 그 거울에 부딪쳐 죽었다는 고사에 빗대 지은 시다. 여기서 난새는 애정과 자유를 잃고 절망하는 난설헌의 분신이고, 돌아오지 않는 제비는 남편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부부간의 따스한 정감과 신뢰가 사라져 버린 공간, 이를 어찌 가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한편에서는 허난설헌이 중국시를 표절했다 하고, 한편에서는 시의 내용이 방탕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반론이 더 우세하다. 그녀의 시는 표절이 아니라 환골탈태이며, 또 창작 당시 조선 시단을 강습했던 학당(學唐)의 복고주의 경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방탕도 마찬가지이다. 그녀의 호방한 기질상 애정의 진솔한 표현은 당대의 성리학적 윤리관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을 방탕으로 폄하했던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할지라도 결혼한 이상 사대부가의 여인이 시댁에서 몸을 빼칠 수는 없다. 대신 그녀의 정신은 상상의 공간에서 억눌렸던 자아를 마음껏 펼친다. 여상서(女尙書·중국의 동한 때 궁중에서 문서정리를 위해 여자에게 내린 관직)가 되어 황제의 조서를 기다리는 등 남성과 다름없는 사회적 자아실현의 열망을 궁사(宮詞·궁중의 사건이나 풍경을 칠언절구로 표현한 시) 형식에 담아 보기도 했다.
여류시인으로는 전무후무하게 그녀가 펼친 상상력의 극한은 작품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유선시(遊仙詩·시적 자아가 선계에서 표표히 노니는 것을 내용으로 한 시)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부조리한 현실 너머 피안에 세워진 이 이상세계에서는 억눌렸던 자아의 소망이 실현되고 욕망은 능동적으로 모습을 바꾼다. 그러나 그곳도 사랑과 질투, 고독과 기다림이 있는 지극히 인간적인 체취가 풍기는 세계였다는 점이 또한 특별하다.
남성적 지배체제의 외부를 향하여
박지원은 허난설헌의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된 것을 영예롭다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것은 '규중부인으로 시를 읊는 일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라는 전제를 분명히 한 다음이었다. 연암 같은 진보적인 지식인도 그러했으니 예교주의에 사로잡힌 대다수 양반 남성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어떠했을 지는 물어볼 것도 없다.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남성중심의 지배코드와 표상체계에 균열을 내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각인했다. 또 현실에서든 판타지를 통해서든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울타리를 넘어 여성 스스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기를 꿈꾸었다. 성적 경계를 넘어 남녀가 자유로운 인격으로 만나고 상호 존중에 입각해 공동체적 삶을 사는 것이 그녀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 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다.
이 형 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 황진이
조선 연산조 말엽에서 태어나 중종조 후반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개성의 명기이다. 황진사의 서녀 또는 눈먼 여인의 자식 등의 설이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타고난 미모와 시적 재능, 음악적 역량을 갖추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당대의 석학이나 예인들과 스스럼없이 교유하였다. 이생원과 동반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선전관 이사종과 6년간 계약 동거를 했다는 일화에서는 유목적 기질을 엿볼 수 있다. '송별소판서세양(送別蘇判書世讓)' 같은 한시, '청산리 벽계수야' 등의 시조를 포함해 모두 10여 수의 작품이 전해 온다.
● 허난설헌
1563년(명종 18년) 강릉 초당리에서 태어났다. 오빠 허봉의 배려로 손곡 이달에게 한시를 배웠는데 당시풍(唐詩風)에 빼어난 솜씨가 있었다. 15세 무렵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화목하지 못했다. 부친, 오빠, 자식들의 연이은 죽음에 이어, 동생 허균마저 귀양가는 슬픔을 겪은 후 그녀도 1589년(선조 22년) 27세로 요절했다. 저술이 많았으나 유언으로 대부분 불태웠다고 한다. 허균이 남은 210여 편의 시를 수습해 1608년 '난설헌집'으로 출판했으며, 그 이전 1600년에 중국 문인 오명제가 그의 시를 중국에 널리 알렸다.
/그림 박성태·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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