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하자가 생겼다고요?" (주)신원 박성철 회장은 1982년 영국의 밀러사로 선적한 3만장의 스웨터에서 300장의 하자가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3%의 하자까진 허용되는 것이 국제 관례이던 터라 문제가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러나 박 회장은 "국제 관례보다 바이어의 '믿음'을 저 버리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곧바로 300장의 추가 생산을 지시한 뒤 이를 비행기로 급송했다. 물론 배송비를 포함한 추가 비용을 신원측이 모두 부담했다. 6개월 후 방한한 밀러사의 바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왜 타사보다 단가가 높은 신원과 계속 거래하는 줄 아십니까? 바로 박 회장이 '바보'처럼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신원 제품에 대해서는 샘플 검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5%의 검사료도 낼 필요가 없습니다."'믿음'이 '으뜸'
박 회장이 신원을 정상의 패션 기업으로 성장시킨 비결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기업은 고객에게 믿음을 줄 때에만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 박 회장의 경영 철학. 그래서 회사 이름도 믿을 신(信), 으뜸 원(元)을 써서 '신원'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바보'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스웨터 300장'의 예처럼 결국 더 큰 보상으로 돌아왔다고 박 회장은 믿는다.
언론인 출신인 박 회장이 섬유업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1971년. 대기업 하청을 받아 납품을 하면서 점차 사업에 흥미를 붙였고 73년 정식으로 무역업 등록을 하면서 아예 사업에만 전념하게 됐다.
그러나 회사 '이름'대로 사업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75년 미국으로부터 60만달러에 달하는 주문을 받았을 때였다. 당시 섬유쿼터제를 피하기 위해 마 51%, 아크릴 49%로 짜여진 원단을 사용해야 했다. 밤샘 작업 끝에 주문량을 모두 마쳤을 때 원단 자체의 결함이 뒤늦게 발견됐다. 마와 아크릴의 구성비가 거꾸로 돼 있었던 것. '모르는 척 해볼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박 회장은 미국 바이어에게 사실대로 고백했다. 수출은 물거품이 됐고 회사는 파산 직전에 몰렸다. 그러나 이 일로 박 회장의 정직함은 국제 섬유업계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다행히 이 즈음, 일본 수출 길이 열려 재고까지 해소할 수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스웨터 수출
차별화 전략도 신원의 성공에 한몫을 했다. 1971년 대미(對美) 섬유쿼터제가 도입된 이후 다른 섬유업체들은 쿼터 확보에 매달렸지만 신원은 새로운 시장 개척에 주력했다. 박 회장은 "신생 업체인 신원으로서는 전년도 수출실적을 기준으로 정해지는 대미 섬유 쿼터를 따낼 수 없었다"며 "사우디아라비아에 스웨터를 수출하는 등 다른 업체들이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해외 시장개척에 진력을 한 결과, 60여개국에 거래선을 확보하게 됐고 쿼터를 많이 확보한 기업보다 더 많은 수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해외 시장 개척은 자연스레 남들보다 빠른 해외 생산 기지 건설로 이어졌고 이는 신원의 가격경쟁력을 크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힘입어 신원은 90년대 후반 5개의 상장·등록법인을 비롯해 총 25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하게 됐다.
위기에 더욱 빛난 믿음
그러나 무모한 확장 전략은 외환위기와 함께 박 회장에게 시련을 안겼다. 다른 그룹처럼 신원도 금융 경색 및 고금리로 인한 유동성 부족과 전체 계열사의 동반 부실을 피할 수 없었던 것. 급기야 신원을 비롯한 3개사가 98년7월 워크아웃 대상기업으로 선정됐다.
매일 새벽3시30분에 일어나는 전형적인 '아침형 인간'인 박 회장의 저력은 이 때 더욱 빛을 발했다. 박 회장은 "신원은 시장 지배력과 수익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생산과 판매에 모두 강점을 갖고 있어 반드시 회생할 수 있다"고 직원들과 채권단을 설득한 뒤 먼저 자신이 소유한 회사 지분(22.64%)을 모두 회사에 내 놓았다. 이후 박 회장은 워크아웃 3개사를 합병하고 2,000명이 넘던 직원들을 988명으로 줄이는 한편 13개였던 내수 브랜드도 5개로 축소하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결국 신원은 지난해 5월 워크아웃에서 졸업, 정상화에 들어섰다.
실적도 98년 매출 4,890억원, 경상적자 1,407억원에서 2001년에는 매출 5,016억원, 경상이익 39억원으로 개선됐다. 특히 순이익은 2002년 상반기 428억원의 적자에서 지난해 상반기엔 87억원의 흑자로 전환됐다. 박 회장은 "무엇보다 회사와 직원들이 서로 믿고 희생을 감수한 것이 위기 극복의 열쇠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캐주얼 브랜드 '쿨하스'를 성공적으로 출시한 박 회장은 올해에도 신규 브랜드를 출시하는 등 창사 31주년인 2004년을 재도약의 원년으로 삼겠다는 계획이다. 박 회장은 "'신원'하면 누구나 세계적인 패션 명품을 떠올리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 올해도 세계를 앞마당처럼 뛰어다닐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섬유산업연합회장도 겸해
(주)신원 박성철 회장은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도 맡고 있다. 한국 섬유·패션산업의 과제와 전망을 들어봤다.
―사양산업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탈리아 섬유·패션산업을 사양산업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섬유산업도 소량 다품종 생산을 하고 염색, 디자인, 원단에서 고도의 지식과 기술로 승부하면 얼마든지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축적된 경험과 우수한 인력을 바탕으로 브랜드와 마케팅에 정성을 쏟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선 매년 1만명의 패션 관련 전문인력이 배출되고 있다. 섬유산업이야말로 첨단산업이고 고부가가치산업이라는 인식의 전환과 10∼20년에 걸친 장기 투자가 필요하다."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면서 산업공동화가 나타나고 있는데.
"인력산업, 즉 노동집약산업은 해외로 나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반면 지식산업, 고품질 고기술 고부가가치 산업은 국내에 정착토록 해야 한다. 10여년전부터 한국섬유산업은 해외로 나갔다. 이러한 진출에 힘입어 섬유 수출이 계속 증가했고 무역흑자도 늘었다. 수출이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라면 섬유산업은 한국 수출의 버팀목이었다. 지난해에도 섬유 수출은 모두 152억5,000만달러를 기록, 93억8,000억달러의 흑자를 달성했다."
―섬유쿼터제가 내년에 폐지돼 섬유업계에 '빅뱅'이 발생할 텐데.
"2005년은 지난 40년간 유지된 수입국의 섬유쿼터제가 폐지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이에 따라 각국의 섬유 수출량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대신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우리나라는 수입국의 섬유쿼터를 다량 보유하고 있던 터라 중국과 인도 등에 시장을 빼앗길 우려도 적지 않다. 그러나 섬유쿼터제 폐지는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40여년동안 섬유 수출의 노하우가 축적돼 있다. 한국섬유산업은 지금 아주 좋은 때를 만났다 이런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박일근기자
● 신원 어떤회사
1973년 출범한 (주)신원은 섬유 제품 수출을 통해 국제적 명성을 쌓은 뒤 내수에 진출한 국내 최정상의 패션기업이다.
먼저 내수 패션 시장에 주력하고 있는 에벤에셀사업부문은 국내 최장수 숙녀복 브랜드인 베스띠벨리를 비롯해 씨, 비키(이상 여성복), 지이크(남성복), 쿨하스(캐주얼) 등 5개 브랜드를 운용하고 있다. 재고 및 판매현황 등을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웹포스'(WebPos)를 통해 '소비자 반응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2002년 내수부문(5개 브랜드) 매출액은 3,130억원에 달했다.
해외 유수 바이어를 확보하고 있는 해외사업부문(수출부문)은 30년에 걸친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과테말라, 중국, 인도네시아 등 4개의 해외 법인과 90개의 생산기지에서 만든 스웨터, 니트, 가죽 제품 등을 전세계로 수출하고 있다. 73년 스웨터 수출로 시작한 해외사업은 지금까지 단 한번의 적자도 내지 않고 매년 성장, 2002년 1억9,500만달러의 수출을 달성했다. 월마트, 갭, DKNY 등 세계 유수 바이어들이 수출 물량의 55%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안정적 바이어를 확보하고 있다.
신원은 광주, 포항, 대구 등에 '프라이비트'라는 고급 패션전문점을 운영하는 등 최근 사업영역을 유통으로 확대, 업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 박성철 회장은 누구
1940년 전남 신안 출생
한양대 행정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수료
70년 산업경제신문 논설위원
73년 (주)신원 대표이사
81년 석탑산업훈장
86년 금탑산업훈장
98년 한국의류산업연합회장, 한국섬유산업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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