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베라)을 찾는 길은 험난했다. 나는 1975년 5월 말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 제일 먼저 남산을 찾았다. 남산에는 당시 장안에서 가장 큰 선인장 온실을 갖춘 식물원이 있었다. 하지만 베라라는 알로에 종(種)의 생김새조차 아는 이가 없었다. 남산 계단을 내려오는 발길은 천근처럼 무거웠다.창경원 식물원(과천 서울대공원으로 이전)과 제주농고 등 꽤 이름난 열대식물 표본 온실도 샅샅이 뒤졌지만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원예 전문가들도 "그게 알로에 맞습니까?"라고 되묻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 두 달을 허비하는 사이 여름이 됐다. 75년 여름도 제법 무더웠다. 나는 만성변비와 위장병이 차츰 나아지고 있는 마당에 류머티스 관절염 등 다른 병이라고 못 고칠 이유가 없다며 마음을 다잡았다. 물론 농장일과 집안일을 힘겹게 꾸려나가는 칠순 노모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지만 몸을 성히 만드는 게 내겐 더 급했다.
나는 베라의 실물을 구하려는 노력은 일단 접어둔 채 타깃을 식물원에서 도서관으로 돌렸다. 외국의 연구 논문이라도 읽기 위해 하루종일 도서관에서 살았다. 당시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국내에서 외국 문헌을 가장 많이 소장해 주로 그곳을 애용했다. KAIST에는 냉전 시대인데도 소련과 중공을 비롯한 공산권 문헌도 적지 않았다. 그곳에서 잡지와 논문 등 10개 정도의 희귀한 자료를 구한 나는 알로에에 관한 이론을 하나하나 쌓아갈 수 있었다.
도서관 생활을 하면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어린 시절이 절로 생각났다. 내 나이 마흔 일곱이었지만 마음은 청운의 뜻을 품은 10대로 돌아가기도 했다. 내가 다닌 경성사범학교는 폐결핵 진단이 나오면 휴학 명령을 내렸다. 42년 가을 폐결핵 판정을 받은 나는 1학년을 간신히 마치고 그 해 겨울 고향 통영에 내려왔다. 이듬해 봄이 되자 학교 담당의사에게 몸이 많이 회복됐으니 복학을 허용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리고 완쾌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반어거지로 43년 새 학기부터 다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복교 후의 생활은 더욱 비참했다. 2학년 때인 43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한창 수세에 몰린 상황이었다. 매일 두시간씩 군사훈련에 이어 방공호 구축 작업 등에 끌려 다니다 보니 몸은 더 엉망이 됐다. 많은 이들이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 가난한 시골 출신의 15살 소년이 객지에서 혼자 자취를 했으니 사는 꼴이 오죽 했겠는가.
그러던 6월 어느 날 어머니가 학교로 찾아왔다. 밤새 꿈이 사나워 새벽 길을 달려왔다는 어머니는 내 몰골을 보고는 기겁을 했다. 어머니는 교실에서 책을 챙길 틈도 주지 않고 내 손을 부여 잡은 채 곧바로 서울역으로 향했다.
당시 우리 집은 통영에서 거제도 옥포로 이사한 뒤였다. 어머니는 집안일엔 무심한 아버지 몫까지 떠맡아 우리 다섯 남매를 키우신 여장부였다. 당시 생활은 몹시 쪼들렸다. 교회 전도사일과 삯바느질을 하신 어머니 수입으로는 시래기죽이나 쑥 죽, 보릿가루죽을 먹을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유일한 낙은 독서였다. 지적 호기심에 사로잡힌 꿈 많은 소년시절 나는 세계의 고전들을 탐독하느라 밤을 지새우곤 했다. 링컨의 전기, 간디의 연설문은 물론 세계사상전집 등을 두루 섭렵했다.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아 BC 2세기의 천체 학자인 에라스토테네스가 지동설을 주장하면서 펼친 이론을 지금도 기억할 정도다. 그때는 정말 향학열에 불탔다.
문헌을 통해 미국에 베라 농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무작정 미국 대사관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무조건 베라를 먹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멍한 표정을 짓던 대사관 직원은 "미국 농무부에 확인해 보면 해답을 찾을 수도 있다"며 내가 원하는 정보를 꼼꼼히 메모했다. 드디어 일주일 뒤 미국에서 베라를 수입할 수 있다는 낭보가 날아왔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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