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 바꾸어라." 총선을 앞둔 설에 고향을 다녀온 정치인들에게 유권자들이 분명히 전한 민심이다. 유권자들은 낡은 정치인의 전면적 교체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1987년 민주화 이후 정권교체는 있었지만 정치인의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민들이 대표의 선택권을 회복했지만, 구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국민 위에 군림하고 권력을 사유화해온 부패, 비리, 구태 정치인들이 지역주의와 보스의 힘을 빌어서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 결과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지 못하고, '새 부대에 헌 술'을 담게 되었다. 민주주의의 하드웨어인 민주적 제도와 소프트웨어인 민주적 운영시스템을 갖추었으나, 그 제도와 시스템을 움직이는 운영자들인 대표들은 구 권위주의 시대의 사람들이어서 대표성, 책임성, 투명성을 갖춘 민주주의가 작동될 수 없었다.
그래서 97년 투표를 통한 정권교체를 달성한 이후 한국 민주화의 과제는 정치인의 교체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물갈이로 불리는 정치인 교체 운동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 총선에서 '젊은 피 수혈론'이란 이름 하에 위로부터의 물갈이가 있었고,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이름 하에 시민단체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물갈이 운동이 있었다. 특히 낙천, 낙선운동은 유권자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치판은 바뀌지 않았다. 정치 수요자인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익 추구와 권력투쟁에만 몰두하였고, 정치시장을 개방하기보다는 기득권을 보호하는데 열중하였다.
지난해 말 정치권 전반의 비리, 부패, 부정이 불거지면서 민심은 정치판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의 대대적인 정치인 물갈이에 모아지고 있다. 마침내 국민들은 정치인 교체 실패가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자인하고, 이번 총선에서는 연에 얽매이지 않고 낡은 불량 정치인들을 투표로 축출하겠다는 경고를 보낸 것이다.
확실한 민심의 신호를 읽은 정치권은 물갈이의 거센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서는 당선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한나라당은 노장 의원들의 자진 출마포기와 공천 물갈이를 시도하고 있고, 민주당에서도 호남 중진 용퇴론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 정치권이 시도하고 있는 물갈이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첫째, 물갈이 주체의 문제이다. 그것은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당 지도부에 의한 위로부터의 공천 물갈이인데, 물갈이 대상이 물갈이를 주도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갈이의 궁극적 주체는 국민이다. 그렇다면 공천과정에서부터 국민들에게 물갈이 선택권을 주어야 하고, 시민단체들의 물갈이 요구도 경청해야 한다.
둘째, 물갈이 기준의 문제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공천 물갈이 대상은 대체로 다선 노장 의원들이다. 이는 정치권이 물갈이를 기본적으로 세대교체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치인 교체와 정치권의 세대교체는 같은 말이 아니다. 물갈이 대상은 '늙은 정치인'이 아니라 '낡은 정치인'이다. 생물학적 세대를 물갈이의 기준으로 삼아 나이는 많으나 개혁적인 '만년 청춘'의 노장 정치인들을 물러나게 하고 나이는 젊으나 구 정치인보다 더 낡은 정치행태를 보이는 '애늙은이' 정치인으로 교체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세대교체의 기준은 생물학적 세대가 아니라 정치학적 세대가 되어야 한다.
셋째, 물갈이 시스템의 문제이다. 최종적인 물갈이는 선거에서 이루어진다. 공천 물갈이는 1단계 물갈이일 뿐이다. 공천 물갈이를 통해 본선 경쟁에 나선 신진 정치인들이 받을 차별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선거에서 물갈이가 이루어지기 힘들다. 따라서 선거운동, 선거자금모금 등에서 신진 정치인에 가해지고 있는 족쇄를 풀어주는 선거 시스템의 개혁이 뒤따라 주어야 정치인의 교체가 이루어질 것이다.
임 혁 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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