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순이는 알겠는데 빠줌마는 뭐냐구요?" 다소 경박한 표현인 '빠순이'라는 말은 10대 팬덤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TV나 영화 스타에 열광하고 눈 한번 마주치기 위해 방송국 앞에서 혹은 스타의 집 앞에서 몇 시간씩 기다리는 등의 극렬 팬의식 즉, 팬덤 현상은 10대 여중·고생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다. 팬덤 현상에 대한 기존의 시각 역시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학력과 소득이 낮을수록 팬덤에 빠져들기 쉽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 팬 문화는 달라졌다. 소위 '빠줌마' 혹은 '빠누나'로 불리는, 20대 후반에서 30대에 이르는 아줌마 팬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조용필이나 클리프 리처드의 공연 당시 보여준 동시대의 스타에 대한 열광과는 다르다. 아줌마 팬은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어린 배우나 가수에 대한 애정을 당당하게 드러낸다.아줌마들 "바람 나고파요"
16일 밤 11시 무렵. 탤런트 김래원(24)의 아줌마 팬클럽 '래워니와 바람나기'의 인터넷 정기 채팅이 열리는 시각이다. 이 팬클럽의 가입조건은 김래원보다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 것. 채팅 방에는 "에휴, 이 나이에 주책이지요"라고 쑥스러움을 털어놓는 48세의 주부, "학교 다닐 때도 멀쩡했는데 다 늦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30대의 직장 여성, 25세 직장인 등 어느새 10여 명의 다양한 팬들이 모였다. 한 번 모이면 평균 4∼5시간씩 채팅을 한다는 이들은 '바람나기'라는 팬카페에 대해 "신바람이 나고픈 소망을 담아 지은 이름"이라고 소개한다.
30여 명의 '래워니와 바람나기' 회원들은 최근 김래원의 공식 팬클럽 '미르'로부터 강제 탈퇴를 당했다. 김래원의 소속사는 "스타의 사생활을 침해하는 등 지나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켜 경고 차원에서 조치를 취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그 배경에는 아줌마 팬집단 간의 기득권 다툼과 지나치게 목소리가 큰 아줌마팬을 정리하려는 의도가 놓여있다.
팬클럽 내에 아줌마 팬이 늘어나면서 팬미팅 주최, 팬클럽 관리 등 스타와 직접 접촉할 기회가 주어지는 팬클럽 운영권을 둘러싼 갈등이 생긴 것이다. 김래원 팬의 경우도 팬클럽 중 누나들의 모임인 '돌핀'이 이 역할을 독점하자 '래워니와 바람나기' 회원들을 중심으로 항의가 나왔다. 일부 회원들은 김래원과 가깝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집 내부사진을 사진 찍어 공개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 도에 지나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 바람에 아줌마 팬 사이에서 분란이 생겼고 급기야 소속사는 '래워니와 바람나기' 회원들을 탈퇴 조치하면서 사건을 정리하려 했던 것이다.
아줌마 팬은 다르다
아줌마 팬의 특성은 이처럼 '말 많고 통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10대 팬이 스타에게 감히 잘잘못을 지적하지 못하거나 어떤 건의를 하지 못하는 것과 달리 아줌마팬은 "그 드라마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 출연하지 말라" "요즘 옷 입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코디네이터를 바꿔라" "라이브 연습을 더 해야 한다" 등 끊임없이 조언을 하려 든다.
스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사가 신문에 나거나 인터넷에 악성 루머가 떠돌 때 가장 극렬하게 대응하는 이들도 아줌마 팬이다. 소녀 팬이 감정적인 대응에 머무르는 것과 달리 이들은 사태를 논리적으로 파악하고 소속사를 대신해 법적 대응까지 불사하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특징이다.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도 다르다. 경제력이 있는 아줌마 팬은 스타에게 과감하게 투자한다. 영화 '스캔들' 개봉 당시 배용준의 팬들은 극장을 통째로 빌려 팬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스타들이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을 정도의 고가의 선물을 안기는 것도 특징이다. 명품 옷, 지갑, 가방, 시계 등을 선물하면서 "친동생처럼 느껴져 전혀 아깝지 않다"는 이들이 아줌마 팬이다. 한 탤런트의 경우 술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아줌마 팬들로부터 수백만 원 대에 이르는 고가의 양주 선물이 줄을 이어 당황했다.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스타는 롱런한다"는 속설 탓에 기획사는 아줌마 팬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게다가 전문직 종사자가 중심이 된 아줌마 팬의 모니터 자료는 스타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제도화한 팬클럽을 통해 팬을 관리하려는 기획사에게 머리 굵은 아줌마 팬은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한 매니저는 "10대 팬이 스타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데 비해 아줌마 팬은 사회적인 인맥을 동원해 일대일 접촉을 꾀하는 경우가 많다. 아들 혹은 동생 같이 생각해서인지 도시락을 싸서 촬영장에 찾아오는 경우도 많은데, 감정 몰입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아줌마 팬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큰 코 다친다. 10대 팬과 달리 어쩔 수 없이 악수라도 하고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고 털어놓는다.
이 나이에 왜냐구?
아줌마들이 좋아하는 스타는 따로 있다. 아줌마 팬이 많은 3대 배우는 김재원, 배용준, 김래원. 권상우, 원빈, 세븐, 비 등도 유난히 아줌마 팬이 많다. 이들에게는 여리고 철 없는 동생 같은 이미지를 풍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에게 소위 '마미필'(Mommy Feel)이라는 애정표현 방식으로 대하는 아줌마 팬들의 모습은 자식이나 동생을 대하듯 보살피고 감싸는 것이다.
어린 남성 스타에게 성인 팬이 생긴 것은 대중의 취향 변화와 관계가 있다. 남녀 관계가 변하면서 스타와 팬의 관계는 추종하고 동경하는 차원에서 나아가 키우고 아껴주는 차원으로 바뀌고 있다. 성인 팬덤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그룹 god부터다. TV프로그램 '육아일기'를 통해 남성이 가진 모성을 내보이면서 성인 여성 사이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왕엄마'로 불리는 멤버 손호영의 누나, 아줌마 팬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이들은 "나이 값 못한다"는 주변의 힐난을 감수해야 한다. 스타와 팬에 대한 분석을 담은 'god 스타덤과 팬덤'의 저자인 박은경(31)씨 역시 20대 후반 뒤늦은 나이에 스타에 대한 열병을 앓았다. 그는 아줌마 팬덤의 원인으로 "아줌마들이 자기 표현 욕구를 해소할 장이 없다"는 점을 꼽는다. "팬덤 형성 계층은 중학생이 많고 대학생 층에는 없다가 주부에 이르면 다시 많아진다. 20대 초반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도 20대 후반에 이르면 결혼과 함께 사회적 네트워크가 끊긴다. 그 네트워크를 마련하고 싶은 소망 때문에 팬 문화에 적극 동참하는 것이다." 여성들이 팬 문화라는 향유 공동체 속에서 친밀감을 형성하고 욕구를 해소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성인 팬덤은 대중문화의 소비층을 넓히고 또 적극적인 자기 표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문화의 유아화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문화평론가 박기수씨는 어린 남성 스타에 대한 환호는 기호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말하는 '시뮬라시옹'(Simulation·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가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 효과를 극대화한다고 말한다. "10, 20대 초반에는 자신의 몸이나 섹시함에 대해 끊임없이 억압했던 여성들이 젊고 건강한 스타에 대한 애정을 표시하면서 심리적 보상을 얻는 셈이다. 게다가 연하 남성과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은 대리만족을 느끼도록 한다"고 박씨는 분석했다.
하지만 성인 팬덤이 10대 팬덤과 마찬가지로 미성숙한 팬문화를 보여주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성인 팬덤이 소모적이고 퇴행적인 문화라는 비난에서 벗어나 긍정적 문화로 정착하느냐의 여부는 아줌마 팬들의 과제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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